일회용 정치개혁 안된다
	2003-11-11
일회용 정치개혁 안된다 최근 정치권이 연일 강도 높은 정치개혁안을 발표하고 있다. 지구당·후원회 폐지와 정치자금의 수표·신용카드 사용, 전국구 의원 전원 교체 등 지금까지 정치권에서 개혁안 논의 때마다 정치인들 간의 첨예한 이해로 사생결단식 논란이 되었던 문제들을 각 정당 대표들이 경쟁하듯 발표하고 있어 실로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때로는 나 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의 고강도 개혁안이어서 과연 현실화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이번 정치개혁안은 각 정당이 개별 차원에서만이 아니고 각 당 원내대표들이 회담을 갖고 합의해 발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회의장이 4당 원내총무들과 회동한 후 기자회견을 통하여 발표한 내용이기에 어느 때보다 실현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도 정치개혁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으니, 이제는 정치개혁에 관한 한 정치권의 합의는 이루어진 셈이다. 불과 한달 전만 해도 누가 감히 지구당·후원회 폐지를 상상할 수 있었는가. 더구나 내년 총선거가 불과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조직과 돈줄인 지구당과 후원회를 폐지하겠다니 이는 가히 정치혁명이다. 재신임을 묻는 대통령의 초헌법적 발상보다도 더욱 혁명적이지 않은가. 그동안 시민단체와 학계, 그리고 선관위가 얼마나 많은 정치개혁안을 내놓았는가. 심지어 정치개혁범국민추진협의회까지 만들어 최소한 정치자금 실명제만이라도 정치개혁 차원에서 입법화해 달라고 국회에 애걸하듯이 외쳐대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정치권이 어떻게 이렇게 변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노 대통령의 재신임 투표 발표로 이런 결과가 나왔다면 대통령이 재신임 투표 발표를 수십 번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현재 각 정당에서 주장하는 정치개혁안의 속셈을 살펴보면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개혁안이 그렇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특히 돈 안 드는 선거를 위한 선거완전공영제 실시를 최우선 개혁으로 주장하고 있는데, 그 진의가 의심된다. 기업으로부터의 정치자금을 정당이나 정치인이 직접 받지 않고 선관위를 통하여 받겠다는 것이며, 동시에 선거비용을 국가에서 전액 책임지고 조달·관리하라는 것이다. 지난해 중앙선관위에서 제안했던 바대로 기업의 법인세 1%를 선관위에 정치자금으로 기탁하면, 정치권이 손 벌리지 않고 이를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깨끗한 선거를 위한 선거완전공영제가 실시되려면 우선 정치인들이 정치비용을 스스로 줄이는 노력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불법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선거완전공영제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선관위를 통하여 기업으로부터 합법적인 정치자금을 받고, 다른 한편에서는 불법으로 검은 돈을 받으면 정치자금만 더욱 보태주는 꼴이 된다. 후원회를 폐지해 그나마 있던 공식적 정치자금 통로를 차단하고 불법 정치자금 통로만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 지구당은 없앤다고 해놓고 오히려 선거 때 사조직만 더욱 극성을 부리게 하는 것은 아닌지 꼼꼼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정치자금법의 엄격한 적용도 전제되어야 한다. 정치자금법 위반자는 최소한 10년 정도 피선거권은 물론 선거권을 완전 박탈해야 하며, 정치자금법의 공소시효도 연장해야 된다. 지금까지 있었던 불법 정치자금 수수도 진실되게 고백, 법의 심판을 받겠다는 약속도 해야 된다. 정치개혁을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불법 대선자금으로 야기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일회용 냄비식의 정치개혁은 더욱 안 된다. 쉽게 달구어지고 쉽게 식는 냄비보다는 가마솥의 자세가 오히려 바람직하다. 각 당 원내총무들이 국회의장과 합의한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를 조속히 발족, 차근차근하게 정치개혁안을 마련해야 된다. ‘혹시나’ 하는 정치개혁에 대한 기대가 이번에도 ‘역시나’가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김영래 (아주대 정치학 교수) 출처 - 세계일보 2003. 11. 11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