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사함' 받으려면
	2003-10-28
'죄의 사함' 받으려면 내년 총선을 코앞에 둔 정치권이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허둥대고 있다. 재신임 국민투표와 맞물려 청와대와 4당의 대선자금 해법 또한 제각각이다. 적당히 사과도 했다가 죄를 사하여 달라고 구걸도 해보지만, 반성은커녕 검찰수사가 편파적이어서 중단시켜야 한다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한편에서는 무릎 꿇고 빌어도 시원찮을 죄인들이 적당히 자백하면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용서받겠다고 우기고 있다. 용서받아야 할 가해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에게 면죄부를 발부하려는 꼴이다. 야당에서는 검찰수사를 못 믿겠으니 중단시키고 대선자금 전면 특검을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국가와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신과 자기 당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정치인을 국민의 대표로 뽑아 나랏일을 맡겼다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후회막급이다. 대선자금을 건넸다는 기업인과 일면식도 없고 1원 한푼 받은 적 없다던 기세는 어디 가고 비루하게 용서를 구걸하다 못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기는커녕 상대방까지 물고늘어지는 정치인의 모습을 보면서 연민의 정마저 느낀다. 지금 저들은 신성한 종교언어인 고해성사나 고백성사를 말하고 있지만, 참회와 반성의 빛도 보이지 않으며 앞으로 다시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보여 주지도 않는다. 용서의 전제가 돼야 할 자발적 양심고백과 자기반성의 모습이 전혀 아니다. 국민의 눈에는 고해를 가장한 전략적 시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표와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적당한 선에서 밝히고 또 적당히 뉘우치는 시늉을 하는 것쯤으로 비춰질 뿐이다. 그리고 설사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한다 하더라도 특별법을 제정해 불법 정치자금의 실타래를 푸는 것은 법치국가의 이념에도 맞지 않는다. 이는 법률만능주의의 발상일 뿐이다. 국민들은 자신의 부정부패를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법을 제정하라고 국회의원에게 권한을 위임한 것도 아니다. 실정법을 위반하면 누구든 예외 없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여야가 정치논리로 타협해 특별법을 제정한다면 이는 입법부의 권한남용이며, 정치적 목적을 위한 정략적 발상일 뿐이다. 불법 정치자금과 대선자금에 자유롭지 못한 정치인들이 진정 뉘우치고 용서받고 싶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불법 정치자금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은 없다’느니, ‘검찰수사 중단하고 대선자금에 대한 전면적인 특검수사를 실시하라’는 식의 물타기와 물귀신작전 같은 비겁한 일을 삼가야 한다. 왜 우리만, 왜 재수 없게 나만이냐고 항변할 때가 아니다. 국민 앞에 석고대죄를 드리며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대국민사과를 발표한 야당대표가 대선자금 전면 특검법을 제정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을 인정 못하겠다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여야 국회의원들이 진정 죄를 사함 받기를 원한다면 검찰이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힐 수 있도록 검찰수사에 협조하는 한편, 철저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한다. 검찰수사의 결과가 부당하고 편파적이라면 그 때 가서 특검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정치자금법을 포함한 정치개혁에 힘쓰면서 조용히 내년 총선에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용서의 전제는 진실과 참회이며 앞으로의 다짐이다. 그런 모습을 보일 때만이 피해자인 국민은 국회를 믿고 정치인을 포용해 그들에게 거듭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한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河泰勳 (고려대 법학 교수) 출처 - 세계일보 2003. 10. 28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