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가 넘치는 따뜻한 세상
2003-10-26
기부가 넘치는 따뜻한 세상 나는 기본적으로 ‘다 쓰고 죽는 것’에 찬성하는 편이다. 노인들이 먹을 것, 입을 것 아껴가면서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나라 노인들도 스스로를 위해 좀 더 많은 것을 투자하면서 풍요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많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줘 봐야 득보다 실이 많을 수도 있다. 유산 분배를 둘러싼 싸움처럼 보기 흉한 것은 없다. 그뿐인가. 사회적으로도 상속은 빈익빈 부익부(貧益貧富益富) 현상을 부채질하기 때문에 해롭다. 그러니 결국 대안은 다 쓰고 죽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소시민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도 가끔 신문에서 남을 위해 모든 것 남기고 가는 할머니들에 관한 기사를 접할 때면,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이런 인생도 있구나, 재산을 남기고 죽는다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이름 없이, 때로는 초라할 정도로 한 평생을 살았으되 죽어서 훨씬 더 풍요로워지는 그런 삶도 있구나…. 그럴 때, 다 쓰고 죽어야 한다는 평소의 나의 신념은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지던지.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의문도 없지 않았다. 왜 할머니들뿐인가. 경제적으로 할머니들에 비할 수 없이 많은 것을 가지고 계시는 할아버지들은 왜 그렇게도 남에게 인색한가. 그러던 차에 며칠 전 내가 품었던 의문을 통쾌하게 깨부수는 소식, 즉 할아버지들도 남을 위해 전재산을 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기사를 읽었다. 내용인즉,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自手成家)한 팔순의 기업가가 근검절약하며 억척스레 모은 전재산을 지역 사회의 대학에 아낌없이 기부했다는 것으로서, 이 분이 기부한 금액은 국내 대학 기부금 사상 최고의 액수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난무하는 공격적인 싸움의 근원이 결국은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 때문이라고 볼 때, 그 와중에도, 팽팽한 싸움과 갈등의 끈을 놓고, 진정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런 어른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런 어른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실 나는 이런 어른이 더 많이 늘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앞으로 이런 어른이 많이 늘어날 것에 대비해서 몇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우선, 그동안 개인적 기부금이 주로 국립대학이나 이른바 일류 대학에 집중되는 경향에 대해서이다. 지방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교육조차도 강자의 논리에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나 할 것 없이 공부 잘하고 똑똑하고 의지가 투철한 학생들과 그런 학생들이 다니는 대학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렇지 못한 학생들의 교육 환경과 미래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장래가 이른바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만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 그동안의 발전이 비록 공부는 잘하지 못했지만 묵묵히 자기 일을 맡아온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고 볼 수는 없는가. 그런 점에서 나는 뜻있는 어른들의 관심이 이른바 좋은 대학에 다니는 잘난 학생들에게만 집중됨으로써 이류 대학이나 지방 대학의 잘나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또 하나의 소외감과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불균형’이 확대 재생산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다음으로, 뜻있는 어른들의 관심 영역이 좀 더 다양해졌으면 좋겠다. 문화 사업도 좋지만 특히 각종 복지 사업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물론 점점 심각해지는 빈곤 문제나 소득 불평등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공정한 조세정책이나 사회보장 제도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국가에 모든 책임을 맡기기에는 어려운 사람들의 문제와 욕구가 너무나 시급하고 다양하다. 특히, 정부로서는 당장 지원하기 어려운 분야, 예를 들면 노인들을 위한 그룹홈, 조기퇴직자를 위한 쉼터나 상담실, 여성 가장을 위한 재취업 지원 사업 등에 기부가 이루어진다면 좋겠다.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기부를 원한다면, 관련 전문가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나 기관에 자금을 배분해주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기야 돈이나 집뿐일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시간과 사랑을 쏟는 것도 아름다운 기부임에 틀림없다. 부디 어디에, 무엇을 기부할까 하는 행복한 고민이 흘러넘치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한혜경 (호남대 사회복지학 교수) 출처 - 문화일보 2003. 10. 26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