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혼란 빨리 수습해야
	2003-10-17
국정혼란 빨리 수습해야 '국가위기' 국민들 불안 … 거국비상내각 고려할만 지난 며칠간 한국정치는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 발언으로 큰 충격파에 휩쓸린 형국이 되었다. 안정을 기대하던 대다수 국민들은 나라가 점점 위기상황으로 치닫는 게 아닌가 싶어 불안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다. 이처럼 거꾸로 국민이 대통령을 걱정하고 나라의 앞날을 불안해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지난 IMF 관리체제의 혹독한 시련기에도 국민은 새 정부와 새 대통령의 말을 믿었다. 당장은 정리해고로 직장을 잃은 아픔이 컸어도 곧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잃지는 않았다. 총리가 서리의 꼬리를 떼지 못했던 거대야당의 발목잡기 앞에서도 경제 살리기와 희망의 불씨 지피기에 열심을 다하는 대통령과 정부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한마디로 이 정부를 출범시킨 현재의 우리들이 자괴스럽고 참담할 뿐이다. 거기다가 도무지 희망의 출구가 보이지 않으니 기이한 현상들도 속출하고 있다. 중산층은 이민열풍에 휩싸이고, 가계 빚에 시달리는 서민층과 취업문이 막힌 청년실업자들은 자주 자살을 택한다. 더러는 총기나 흉기 강도로 돌변해 야심한 저잣거리나 백주의 대로에서 자포자기에 가까운 한탕주의를 노린다. 모든 것이 비정상적인 사회병리현상이지만 그 원인은 정치와 정권이 정도를 걸어가지 못한 데 있다. 이런 와중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시정연설에서 재신임 국민투표의 일정까지 제시했다. 재신임 충격파에 휩싸여 우왕좌왕하던 정치권도 당론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임기 5년의 대통령제 아래서 그것도 정권출범 후 8개월여 만에 재신임을 묻겠다는 노 대통령의 폭탄선언은 헌정 사상 전례가 없는 일인 데다 헌법적 근거조차 미약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재신임 논의 자체가 분란에 분란을 거듭하는 소모적인 논쟁이 되기 쉽다. 가뜩이나 불안한 정국에 노 대통령이 이 같은 극단적인 카드를 꺼내 든 배경이 선뜻 납득이 가질 않는다. 20년 측근인 최도술씨의 SK비자금 수수의혹으로 정권의 도덕적 기반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버렸다는 개인적인 판단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10억원의 비자금수수가 정권의 도덕적 붕괴로까지 번질 치명적인 성질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책임총리와 충분한 협의도 없이, 일종의 정치적 도박처럼 승부수를 내던지고 나온 데는 누적된 측근비리와 정치적 무능력을 은폐하고, 내년의 총선까지를 겨냥한 국면전환용 계산이 깔려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정치의 도덕적 기반을 그토록 중요시한다면, 노 대통령은 국민 앞에 사죄의 고백과 함께 겸손을 보였어야 옳다. 사회지도적 원로들에게 조언을 구한다거나 국회나 내각과 사전협의를 한다거나, 인사쇄신을 통해 면모를 새롭게 하는 노력 등은 도덕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온건한 처방들이다. 그런 처방을 찾아 가슴을 열어놓는 자세야말로 위기를 관리할 국가지도자에게 필요한 겸손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제 주사위는 던져진 셈이다. 재신임 국민투표의 가능성 여부는 헌법학자들 간에 견해가 엇갈리고, 정치권의 시각도 다르다. 지금은 소모적인 논쟁으로 국력을 소진할 시기가 아니다. 정부는 정부대로, 국회는 국회대로 지금의 국정혼란을 조속히 수습하고 위기를 극복할 최선의 방도를 찾아 정치적 합의점을 도출해 내야 한다. 이에 필요한 여야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 대통령은 최도술씨에 대한 검찰수사가 끝나는 대로 현 내각을 거국비상내각으로 재편하는 방안도 고려해 보기 바란다. 자칫 재신임 정국이 하야(下野)정국으로 번질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김일수 (고려대 법학과 교수) 출처 - 조선일보 2003. 10. 17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