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정치로부터 해방을
	2003-10-13
기업, 정치로부터 해방을 과거 SK의 비밀스러운 자금 운영이 검찰의 조사를 받으면서 대통령 측근도 연루됐다는 추측이 나돌고 급기야는 대통령 자신이 국민의 재신임을 묻겠다고 나섰다. 거액의 돈이 오고 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정치적으로는 대가성이 있는지, 수수 절차가 적법한지가 문제이다. 그러나 기업측에서는 대표이사가 집행한 이 지출이 기업의 이익 창출에 얼마나 기여했느냐가 문제이다. 하여튼 대통령이 재신임을 묻겠다고 발표한 그날 주가는 근래에 드물게 큰 폭으로 상승했다. 1975년 가을, 30대 초반의 젊은 과학기술학자, 경제학자들이 한국과학원 전기전자공학과 회의실에 모여 우리의 어려운 경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상의하고 있었다. 당시 젊은 조교수였던 필자는 우리가 제조한 펌프의 성능이 떨어지는 이유는 좋은 베어링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고 이는 베어링의 수입, 제조를 독점한 대기업이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화 통신 사업의 낙후성도 독점적 위치에 있는 대기업들이 최신 전자식 교환대의 도입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순진한 주장을 했다. 듣고 있던 한국은행에서 온 김재익 박사는 실질적인 해결 방안을 찾아보자고 했다. 김 박사가 경제기획원으로 옮기면서 베어링 수입 자유화가 이뤄지고 전자식 교환기 도입도 이뤄졌다. 당시 정경 유착으로 독점적 위치를 확보했던 대기업들은 지금은 모두 관치 시장 독점을 버리고 기술 혁신을 통해서 시장의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그 후 필자는 김재익 박사와 몇 번의 업무적 만남이 있었다. 1980년 국보위 시절 과잉 투자된 중화학공업의 해결책을 물어 왔고, 1983년 필자가 연구차 스탠포드대학에 갈 때 미국의 수입제한 조치와 일본 ‘때리기’에 대한 연구를 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아웅산테러 사건이 있었고 필자는 MIT로 옮겨 미국의 경쟁력 강화 방식에 대한 연구를 했다. 시장의 자유경쟁 신봉자인 그에게 미국의 시장경제가 어떻게 경쟁력을 강화하는지에 대한 필자의 연구 결과는 영원히 보고할 기회가 없어졌다. 기업은 시장에 지배를 받는 것이지 정치에 지배를 당해서는 경쟁력을 상실한다. 정부가 시장경제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이미 개방된 세계 시장에서 기업이 경쟁력을 상실하면 생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세계화된 세계 시장에는 정부는 없고 경쟁만 있다. 20여년 전 이미 이런 사실을 간파하고 주위에 준비를 시켰던 김재익 박사의 혜안이 아웅산 20주기를 맞아 새삼 새롭게 생각이 난다. 재론의 여지가 없이 기업이 시장 경쟁에 전념하려면 정부는 대기업들이 과거의 정경 유착 관행에서 자유스러울 수 있도록 사법 처리의 관행을 투명하게 해야 한다. 언제 어느 정도의 죄과가 어떤 정도의 벌칙을 받는지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검찰이 조사해 봐야 알 수 있는 일이라면 지금 당장 모두 조사하여 모든 기업을 과거로부터 자유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지난 5년간 대우에서 시작하여 현대, SK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역사 바로잡기에 너무 많은 세월을 보내고 있다. 공급자 또는 수요자로 기업 활동에 참여하는 국민 모두가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어 과거의 역사로부터 자유스러울 수가 없다면 특별한 경제자유구역을 설정하여 이 구역 안에서만은 정부 규제를 철폐하고 과거 관행에서 벗어나 세계 시장 관행을 그대로 적용하면 홍콩이나 싱가포르 같은 선진 경제가 형성될 것이다. 그 선진 경제를 내국 경제와 접목시키는 전략으로 거대한 중국이 약진하고 있다. 인천 경제자유구역이 먼저 동북아시아의 여러 경제자유구역과 경제협력공동체를 구성하고 그 후에 이 자유구역을 동북아 전역으로 확산하는 방식은 동북아의 경제 발전을 정치 역사의 족쇄에서 해방시키는 방안이 될 수 있다. 대통령의 동북아 경제 중심은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추진하는 것이다. 평화와 번영은 과거 역사에 집착하지 말고 모두가 시장 경쟁이 자유스럽게 이뤄질 수 있도록 시장을 열고 정부의 영향력을 없애는 것이다. 일본이 식민지주의의 역사를 청산하지 않고 중국이 과거 역사적인 이유로 동북 지방의 자치권을 의심한다면 유럽연합(EU)이나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와 경쟁하는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은 물 건너간 얘기이다. 지식 정보 사회에서 경제는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야 번영할 수 있다. 배순훈 (KAIST 테크노 경영학 초빙교수) 출처 - 문화일보 2003. 10. 13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