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충지대 없는 사회
	2003-07-10
완충지대 없는 사회 사회 집단이 분출하고 있다. 이는 굳이 2003년 봄과 여름을 풍미하고 있는 ‘노조 전성시대’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근래에 들어와 사회 각계각층에서 새로운 단체 결성이 일대 러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금년 1월부터 5월 사이에만 340개의 사단법인이 대법원에 새로 등록했다. 하지만 사단법인이 아닌 단체까지 포함할 경우 그 수치는 두 배 이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추세는 “국민이 대통령”이라고 주장하는 ‘참여정부’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을 성싶지만 반드시 노무현 정권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작년과 재작년에도 올해와 비슷한 정도의 집단 폭발현상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함께 뭉친 것은 비단 열쇠업자와 텔레마케터, 대리운전자만이 아니다. 프리랜서와 심마니들도 서로 힘을 합쳤고, 몇주 전에는 10만명에 육박하는 이장과 통장들 역시 전국연합회를 처음 발족시켰다. 서로 유사한 입장과 이해를 가진 사람들끼리 네트워크를 결성하는 일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결사(結社)의 자유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며, 경제 발전은 필연적으로 이익의 분화를 가속화하기 때문이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최근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집단의 증가가 주로 영리적 목적의 사회적 조직화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사회단체의 폭발적 분출이 집단이기주의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민 이익 또는 소비자 보호와 같은 그럴듯한 명분이 이권 독점의 소지나 기득권 유지의 혐의를 쉽게 감출 수는 없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는 천직(天職)과 성직(聖職)이 사라지고 공직(公職) 또한 무너지고 있다. 장인정신(匠人精神)의 약화와 소명의식(召命意識)의 쇠퇴는 더 앞서 벌어진 일이다. ‘밥그릇 전쟁’의 원인이자 결과로서 너도나도 끼리끼리 뭉치는 일에만 매진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직종이나 직업 혹은 사회적 역할 간의 기능적 의존성이 날로 심화되는 경향은 이른바 ‘약자의 무기’를 점점 더 위력적으로 만든다. 이제 세상을 멈추게 하는 것은 비단 화물연대나 철도파업만이 아니다. 음주 단속을 피하느라 대리운전이 점차 일상화되는 사회라면 대리운전자들도, 전화 상품 주문 중독자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세상이라면 텔레마케터들도, 풀뿌리 지방자치가 유난히 강조되는 시대라면 전국의 이·통장들 역시 언젠가는 세상을 멈추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갈등 관리를 위한 제도적 장치나 사회 통합을 위한 문화적 기반이 거의 붕괴하다시피 한 우리나라 현실이다. 그 결과 모든 사회단체의 이익집단화가 무심히 방치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전투적 노조화(勞組化)에 대해서도 별다른 대책이 있을 리 없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최근 노동대란에서 그 예고편이 상영된 ‘소용돌이 사회’를 향해 급하게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다. 지난 대선을 전후하여 정당정치, 특히 집권 여당은 사실상 실종되었다. 일부 유력 시민단체들도 비(非)정부기구라기 보다 친(親)정부기구(‘Near’ Governmental Organization)에 가깝다. 관료사회는 대통령의 친위조직으로 거듭나려 하고 있으며, 언론계 또한 치열한 내전 상태다. 이처럼 중간 지대나 완충 지역 혹은 여과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진대 만사가 정치적 문제로 비화하고 매사가 청와대를 지향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집단이익과 최고 권력 사이의 맞대면과 직거래 이외에 도대체 무엇이 남아 어떤 힘을 쓸 것인가. 최악의 상황은 노무현 정부 스스로 포퓰리즘의 달콤한 유혹에 자꾸 넘어가는 경우에 예견된다. 그것은 각자의 소리(小利)만 좇다가 우리 모두의 대의(大義)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그래도 기왕 가던 포퓰리즘의 길을 재촉할지, 아니면 다른 길을 한 번 시도해볼지는 물론 현 정권의 선택이다. 전상인 (한림대 사회학 교수) 출처 - 조선일보 2003. 7. 10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