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藝기금’ 더 늘려줘야
	2003-05-30
‘文藝기금’ 더 늘려줘야 한 나라나 집안이 가장 어려울 때 먼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제2차대전이 끝나자 프랑스 정부는 외국 은행에서 돈을 꾸어 세계 각국 젊은이들에게 장학금을 주며 전후 복구에 바빴던 자기 나라에 불러들였다. 유학생들은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정신을 배워갔다. 그 장학금을 받았던 프랑스 문학자 민희식 교수는 귀국한 뒤 한국에서 프랑스 문학과 예술의 위대한 정신을 가르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유학시절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는 말했다. “나는 그때 프랑스에서 받았던 장학금을 아마도 수천 배로 갚았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문화나 예술은 바로 그 자리에서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값을 지녔다. 지난 40여년간 그가 한국의 대학 강단에서 풀어놓은 프랑스 문화 예술의 전파력은 정말 가난한 한국 유학생이 받았던 장학금 액수의 수천 배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한국에는 옛 문화재가 아주 많을 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을 창조하는 능력을 지닌 인재가 아주 풍부한 나라다. 1240년에 몽골 대군이 내침하여 황룡사 탑을 불태우고, 그 군대를 대거 진주시켜 나라를 온통 분탕질하던 1251년에 대장경판 재각을 완성하였다든지,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 9년에 걸친 나라 재난을 겪으면서도 명륜당을 재건한다든지, 일제 36년 동안 일본의 그토록 참혹한 수모를 견디면서도 많은 문학작품을 남겨 한 종족이 지닌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는 데 끊임이 없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 대통령으로 당선된 드골은 작가 앙드레 말로를 문화장관으로 임명, 국가 재정 중 가장 큰 몫을 문화부처가 쓰도록 배려했다. 문화를 ‘나라의 힘’으로 생각하고 키운 것은 그저 먼 나라 일이거니, 생각할 일이 아니다. 놀랍게도 1973년 박정희 군사 정권은 혹독한 독재권력을 행사하면서도 문화예술 지원을 위해 한국문예진흥원을 설립했다. 올해로 30년을 맞은 문예진흥원은 크고 작은 사업을 통해우리 문화 예술에 대해 갖가지 지원을 해왔다. 돈벌이 안 되는 작가와 문예전문지를 위해 원고료 지원을 했던 시절도 있고, 공연 예술의 화려한 무대 뒷면에서 묵묵히 일하는 전문 인력을 키우는 데 투자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닉한 것은 정부가 점차 민주주의 원칙에 가까워지는 정권으로 바뀌면서 문화예술 부문에 대한 지원은 오히려 전만 못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부로 출범했던 정부 조직을 공보·체육·관광과 합쳐 놓고 문화 예술이 어느 정도 지위의 정부정책인지 알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일은 애석하기 짝이 없다. 거기 더해, 올해 말로 문예진흥기금 걷는 일이 끝나면서 당장 문화예술 진흥 예산을 어디서 조달할 것인지,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해결책이 묘연하다. 문예진흥기금의 새로운 재원(財源)으로 로또 복권의 수익을 분배하자는 요구가 일고 있다. 이미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그 같은 제도를 성공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게 참고가 됐다고 한다. 국민의 요행심을 부추겨 거둔 기금을 정부가 맡아 쓴다는 데 이론이 있기도 하지만, 이왕 그런 제도를 운영할 수밖에 없는 마당이라면, 마땅히 그것은 문예진흥 기금을 조성하는 앞자리에 놓고 정책이 결정되어야 한다. 정부는 아예 문예진흥 기금을 따로 충분하게 책정, 국민의 세금이 국민들의 문화예술 향수와 창조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정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라면, 지금까지처럼 수혜자 부담 원칙을 적용하든지, 아니면 로또 복권 수익금을 문예진흥기금 예산으로 대폭 활용하는 법안을 정부가 나서서 법제화해야 한다. 나라 살림이 어려울수록 문화 예술 살리기를 뒷전으로 내몰아서는 안 된다. 문화는 언제나 앞자리에 내세워야 할 한 민족 집단 정신 그 자체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정현기 (문학평론가 / 연세대 국문과 교수) 출처 - 조선일보 2003. 5. 30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