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요구하는 ‘체제보장’의 의미
	2003-04-11
북한이 요구하는 ‘체제보장’의 의미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현재의 상황은 한때 전면전 직전까지 치달았던 지난 1993~94년을 방불케 하는,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상태로 악화될 위험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10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성 동북아시아-태평양 담당차관보 등 미국 정부 특사단의 방북 당시 북한이 지난 1994년 체결된 제네바 핵합의 이후에도 우라늄 농축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이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북한의 핵개발 의혹해소 요구 거부에 따라 제네바 합의에 명시된 대북 중유공급이 중단되었다. 1개월 후 북한은 전기공급이란 구실아래 지난 8년 동안 동결되었던 영변의 핵관련 시설을 재가동할 것임을 선언하면서 북한의 핵개발 여부를 감독하기 위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시설 감독장치를 해제하고, IAEA 상주단을 추방하는가하면, 역시 제네바 합의에 따라 지난 8년 동안 지속되었던 폐연료봉에 대한 봉인도 제거시켰다. 지난 1월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를 선언했으며, 노무현 행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 2월 말에는 영변의 5㎿ 흑연감속형 원자로 재가동이 확인되었으며, 핵탄두 제조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추출하기 위한 폐연료봉 재처리를 시도할 가능성도 우려되고 있다. 이와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도 심화되고 있다. 미국은 "외교를 통한 평화적 해결"원칙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북한이 요구하는 미국-북한간 양자대화가 아닌 주변국 및 국제사회가 참여하는 다자간 대화형태를 고수하고 있으며 무력동원을 포함한 모든 선택안이 고려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태평양의 미 공군기지에 B-52, B-1 랜서 등의 폭격기 20여대가 추가배치되고, 니미츠급 대형항공모함 칼빈슨호가 동북아로 파견되어 지난 3월 한미 연합작전 훈련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에 정박하기도 했다. 이라크와의 전쟁을 앞두고(이 글은 3월 16일에 작성되었음) 동북아에서의 전력공백을 매워 유사시 북한의 오판을 막기위한 억지 역할이라고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의지여하에 따라 군사적 수단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북한 또한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하루 전날과 지난 3월 사거리 100km의 실크웜 지대함 미사일을 시험발사하고, 3월 2일에는 공해상에서 활동 중이던 미국 정찰기 RC-135S기에 전투기 4대를 출격시켜 근접비행을 통해 위협을 가하는 등 일단의 무력시위를 보이고 있다. 미국에서 "이라크 다음으로 제거할 대상은 북한"이란 말은 더 이상 낮선 이야기가 아니며, 북핵문제는 UN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이 예정되어있다. 많은 이들이 그토록 우려했던 "마의 2003년"이 이제 부정할 수 없는 당면과제로 우리 앞에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현 위기의 가장 큰 영향권에 놓여있는 한국 내에서 여전히 문제의 심각성과 추구목적 그리고 정책수단 등을 둘러싸고 눈에 띄는 불일치를 노출시키는 것은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 이러한 점들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분명한 태도가 정해지고 실행되어야 할 시점이다. 북한의 핵무장은 21세기 한국․한민족에 대한 사형선고 만일 지금 진행되고 있는 북한의 핵동결 해제가 계속되고 결국 북한이 핵무장에 성공할 경우, 그리고 이에 대한 아무런 후속대책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우선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이 전력의 질적우세와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통해 어렵게 유지해왔던 북한에 대한 군사력 열세극복과 전쟁억지력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질 것이며, 북한은 이미 압도적인 양적 우세와 더불어 한국과 미국의 의지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전략적 우위까지 점하게 될 것이 분명해진다. 또한 이미 지난 몇 년 동안 북한의 내정간섭적인 대남 공세와 일련의 국지적인 군사도발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한국으로서는 앞으로 북한의 노골화된 위협과 요구를 거부하기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이미 휴전선 전방에 전진배치된 북한의 통상전력 위협에 놓여있는 한국의 인질화가 더욱 고착되는 것이다. 또한 북한의 핵무장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이하 WMD) 위협에 놓인 일본의 핵무장을 합리화시켜줄 구실이 될 것이며, 사실상 동북아시아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복귀한 일본이 핵무장을 실현할 경우 동북아시아 전체에 걸친 군비경쟁과 불안정을 가져올 것이다. 요컨대 북한의 핵무장은 한반도에서의 전쟁과 평화 여부를 전적으로 북한 전체주의 정권의 의지여하에 넘겨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한국이 추구하는 "북한의 자발적 변화에 의한 한반도 냉전구도의 청산"은 더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 내부의 혼란과 국제사회로부터 극도의 불신을 야기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점에서 "북한의 핵은 통일이 되면 민족의 자산이 될 것"이라는 일각의 기대는 그야말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의 핵무장은 북한을 더욱 오만방자하게 만들어 통일에 방해만 되게 할뿐이며, 동북아 전체에 걸친 군비경쟁을 가중시켜 그러잖아도 주변국에 대해 심한 군사력의 열세에 놓인 한국의 안보환경을 더욱 불리하게 만들 것이다. 북한의 핵무장은 한반도를 "동북아 평화와 번영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노무현 행정부의 비전을 산산조각 낼 것이다.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전제들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관련국들은 저마다 평화적 해결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상황이 파국으로 치달을 경우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남북한은 물론 한반도에서의 급격한 변화가 자국에 미칠 영향을 경계하는 주변국 역시 이번 위기가 북한의 핵무장과 이로 인한 갈등심화로 비화되는 것을 원치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이냐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번 사건의 해결을 위해 협력해야 할 당사자는 누구이며, 북한과 외부세계는 무엇을 해야하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뜻한다. 우선 또다시 문제를 조장한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통한 해결을 줄곧 요구하고 있으며, 중국과 러시아 역시 미국과 북한 양측간의 대화를 중재하겠다면서 북한의 입장을 두둔해주고 있다. 지난 8년 동안 북한의 핵동결을 유지시킨 제네바 합의가 기본적으로 미국과 북한간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마땅히 이번 문제도 미국과 북한 양측이 당사자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북한이 여전히 한반도 장악을 그들의 지상목표로 명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핵개발 시도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을 당사자는 바로 한국이며, 북한의 핵무장이 세계 4대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동북아시아에서의 핵확산과 군비경쟁을 가중시킬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북한이 이미 수년동안 장거리 탄도미사일과 핵기술 등 WMD의 전세계적 확산에 가담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에서 이 문제는 결코 미국과 북한 양측만의 일로 처리될 수 없다. 북한은 지난 제네바 합의 성사가 자신들과 미국간의 양자대화만이 문제해결의 열쇠라는 점을 입증하는 사례라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지금의 핵문제가 재발됨에 따라서 미국과 북한 양측만을 당사자로 규정하는 방식으로는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게다가 다자간 대화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쌍무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북한이 굳이 미국과의 양자간에만 한정된 대화를 고집하는 저의를 의심케 만들고 있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핵위협 해결이 북한이 요구하는 양측간 불가침조약 체결처럼 미국과 북한 사이에만 한정된 안보상 우려해소 및 관계개선으로 일단락되는 것 역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만일 이것이 실현될 경우 미국은 주한미군의 주둔을 비롯하여 한국에 대한 지난 반세기동안의 안보공약을 폐기해야하는 입장에 놓일 것이며, 이는 한국의 안보환경을 지난 1975년 4월 공산베트남에 패망한 월남과 같은 상황으로 만들어 한반도의 운명을 북한 전체주의 정권의 의지에 맡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북한의 자발적 변화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은 북한이 원하는 것은 단지 생존을 위한 외부세계의 체제보장과 경제지원 뿐이며, 만일 이것만 충족된다면 북한은 기꺼이 핵개발을 포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북한은 정권수립 이래 자신들을 유일한 민족대표라고 자처해왔으며, 남조선 해방이란 미명아래 한반도 전체를 그들 전체주의 정권의 지배하에 두겠다는 목표를 고수하고 있다. 북한이 외부세계의 지원대가로 실천하겠다는 군사적 위협해소의 대상에 줄곧 한국이 제외되어 있으며, 핵개발 포기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것들이 하나같이 한국에 대한 미국 등 외부세계의 안보공약 폐기라는 것은 북한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단순한 생존과 평화가 아닌 한반도 장악을 위한 여건의 확보라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국내 일각의 희망과는 달리 현재 북한이 주장하는 "체제보장"은 자신들의 한반도 장악에 미국과 외부세계가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말하는 것이며, "민족 공조·대단결"이란 자신들이 주도하는 한반도 장악에 한국이 굴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셈이다. 이것은 한국으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내용이며, 이러한 북한의 입장에 변화가 없는 이상 북한 핵개발을 둘러싼 현 위기상황의 평화적 해결노력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만일 평화적 해결이라는 미명아래 북한의 그러한 요구를 수용한다면, 그것은 한국의 운명을 전적으로 미국과 북한 사이의 힘겨루기 결과에 맡기겠다는 발상이며 주한미군 SOFA(주둔군 지위협정)의 불합리성을 방치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고 치명적인 주권위협이 될 것이다. 외교 혼자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무현 행정부는 출범이래 줄곧 어떤 일이 있더라도 현재의 위기가 한반도에서의 전쟁 재발로 악화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며, 북핵문제는 어디까지나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가의 인구와 주요시설의 절반 이상이 집중된 서울이 휴전선에서 불과 4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현실에서 이러한 입장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특정 정책수단을 배제하면서도 북한의 핵개발 위협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무엇보다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의 위기는 금강산 육로관광이나 부산 아시안게임에서의 인공기·한반도기 게양 등의 문제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사안이다. 경제적 이익이나 명예, 자존 등과 같은 국익은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타협과 양보가 가능하지만, 국가체제 존립과 국민생명 보호와 같은 사안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양보될 수 없는 성격의 국익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위협을 막기 위해서는 각 정책수단 사용의 우선순위에 대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특정수단을 배제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지금의 북핵 문제가 바로 그러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상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힘이 필요하다고 한다. 첫째는 상대가 요구에 따를 경우 그에 따른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는 힘(보상력)이며, 두 번째는 상대가 요구에 따르지 않을 경우 감당할 수 없는 불이익을 가할 수 있는 힘(강제력)이다. 과거 김대중 행정부 시절 소위 햇볕정책 지지자들은 보상력만으로도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보상력만으로는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고 해도 직접적인 손해를 입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상대의 변화를 이끌어낼 보장이 없다. 지난 수년 동안 북한이 벼랑끝 전술로 일련의 문제조장을 일삼으면서도 오히려 외부세계로부터 번번이 실리를 얻어냈던 것만 봐도 강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보상력이 북한을 변화시키는데 한계가 있으며, 평화적 해결이라는 이름아래 정책수단의 폭을 스스로 좁히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알 수 있다. 지난 1994년 6월 지미 카터의 방북이 북한측의 양보를 이끈 것 역시 카터 개인의 성공이라기보다는 이것까지 실패할 경우 정권의 패망으로 귀결될 전면전이 불가피함을 북한측에 확신시킨 미국의 무력동원 능력에 의한 것이라는 평가가 보다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유사시 북한에 대한 외교적 고립과 경제적 제재 그리고 무력동원 등 강경책 동원을 가능성에 포함시킬 경우 북한을 자극해서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만일 한국과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가 지금 미국이 이라크에 대해서와 같이 아무런 반대급부도 없이 북한의 무장해제와 정권퇴진만을 요구하고 있다면 그 말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 한국은 더 이상 승공, 북진, 흡수통일을 지향하지 않고 있으며, 이는 노무현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천명한 소위 ‘평화번영정책’의 기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북한을 ‘악의 추축(Axis of evil)'이라고 규정한 부시 행정부의 미국조차 현재로서는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으며, 만일 북한이 핵을 비롯한 WMD와 기타 군사적 위협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면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과감한 접근을 추구할 용의가 있다”라면서 외교적 해결의 우선순위를 강조하고 있다. 북한의 핵시설 재가동의 구실이 된 KEDO의 중유공급 중단과 최근의 태평양 및 한반도 부근의 미군 전력증강 역시 북한의 문제조장 이후에나 나타난 대응적 성격의 것이다. 이러한 한국과 미국 등 외부세계의 태도는 사실상 북한의 생존을 보장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만약 북한의 진정한 의도가 체제보장과 경제적 지원이라면 외부세계의 이러한 요구를 거절할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이 핵개발을 비롯한 WMD에 관한 의혹과 군사적 위협의 해소를 거부하는 것은 그들의 진정한 의도가 평화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만일 유사시 북한에 대한 강경책 사용을 현재의 북핵문제 대처에 있어서 정책수단에서 배제시킨다면 아마 한국과 미국이 전쟁위기를 조장한다는 비난은 듣지 않을 것이며, 덕분에 한국은 도덕적인 자부심을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보상의 위협해소에 대한 믿을만한 변화를 이룬다는 보장을 얻지 못한 채, 현재의 능력만으로도 얼마든지 한국의 국가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북한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평화적 해결이란 명목으로 유사시 강제력의 동원 가능성을 배제할 경우 이는 오히려 ‘북한에 의한 전쟁위험’을 더욱 키울 것이며 한반도에서의 전쟁재발을 막는다는 한국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6.25 전쟁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한반도에서의 전쟁위험은 전적으로 북한 전체주의 정권의 한반도 장악노선에서 비롯된 것이며, 따라서 현재의 북핵문제를 비롯한 ‘북한에 의한 전쟁위험’을 막고 한반도에서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북한의 생존과 재건에 대한 믿을만한 보장뿐만 아니라, 북한이 변화를 거부할 경우 감당할 수 없는 불이익을 가하여 무력위협을 비롯한 일체의 현상타파 시도가 결코 의도한 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함께 입증시켜야 한다. 북한의 의도를 수세적으로 해석하려 드는 이들은 북한의 문제조장 행위를 단순히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을 얻기 위한 협상카드로만 평가하는 반면 한국과 미국의 대응적 전력동원 준비를 전쟁위기 조성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다분히 시각의 형평성과 사실적 판단이 결여된 편견에 불과하다. 오히려 한국과 미국의 유사시 전력동원 능력이야말로 북한에 의한 한반도에서의 전쟁위험을 예방하고 북한을 변화의 길로 유도하기 위해 필수적인 협상카드다. 미국의 악역이 필요하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유사시 대북 강경책의 선택 가능성을 고려할 때마다 거론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미국의 역할이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 혼자만의 역량으로는 북한의 변화에 대한 보상을 제공할 능력밖에 없으며, 북한이 변화를 거부할 경우 불이익을 가할 능력은 부족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재의 북핵위기를 비롯한 북한의 위협에 대한 대처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한국으로서는 이러한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세력과의 공조가 필요하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은 능히 그러한 역할을 해낼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핵개발 시도에 있어서 유사시 군사적 수단의 동원도 배제하지 않겠다고 공언하는 등 스스로 악역을 자청하고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북한의 핵무장은 동북아시아 일대에 주둔중인 자국군대와 본토의 안전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으며, 동북아시아 일대와 테러집단 등 적성세력으로의 핵확산을 야기시켜 자국의 패권적 위치를 위협할 것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저지해야 할 문제이며, 이는 북한의 핵보유를 용납할 수 없다는 한국의 입장과도 공통되는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유사시 군사력동원 준비와 자신들의 쌍무대화 거부 그리고 안보리로의 북핵문제 상정 등을 전쟁위협행위라고 비난하고 있으며, 노무현 행정부의 한국 역시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미국과도 다른 것은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여러 차례 언급하는 등 미국의 강경한 태도에 대한 자제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한반도 장악이라는 북한의 현상타파적인 의도와 한국의 자체적 역량 한계를 간과하는 것으로, 자칫 북한의 사이비 평화․민족공세에 말려들어 ‘북한에 의한 전쟁위험’에 더욱 취약해지는 결과만 야기할 것이다. 노무현 행정부는 북한의 핵개발 시도에 대한 미국의 강경한 태도를 원망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북한의 자발적인 핵폐기와 변화유도를 위한 한국 주도의 외교적 해결노력이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는데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백번 양보해서 미국의 태도가 한반도에서의 전쟁위험을 악화시킨다는 비판이 옳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과연 그것이 북한의 선제침략 위험과 핵무장을 방관하는 것보다 위험한 것일까? 이미 수십년 동안 휴전선 전방에 병력의 절반 이상을 집중시키면서 평시에도 언제든 장거리포로 수도권일대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북한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제침략 위협을 가하는 집단 아닌가? 미국이 서울을 폭격할 것도 아니고, 바로 한국의 국가생존을 위협하고 서울 등 한반도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 북한의 능력을 목표로 선제공격을 하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북한이 한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능력을 상실한다면 한국으로서는 오히려 전쟁의 위험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셈이니 아무 문제가 없지 않은가? 이런 필자의 말이 황당무계한 전쟁광적 망발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북한이 설마 동족인 한국을 상대로 핵을 쓰지 않을 것이라거나, 북한의 핵은 통일 후 민족 전체의 것이 되리라는 근거없는 발상보다는 낫다고 믿는다. 미국의 일방적 행동을 막을 논리를 개발하라 외견상으로 노무현 행정부의 한국은 미국이 북한에 대해 강경책을 쓰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좀 다르다. 지난 3월 초 노 대통령은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군사행동은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나의 공식발언이 북한에 대한 협상력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주변의 우려를 잘 알고 있으며, 나 역시 그 점을 걱정한다"라고 밝혔으며, 지난 3월 5일 영국의 유력일간지 <더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도 북한 전투기의 미국 정찰기 위협사건에 대해 미국의 강경책 자제를 촉구하는 한편으로 ”상대에 대한 강력한 위협이 협상의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적어도 북한이 협력을 거부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불이익을 가할 수 있는 강제력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미국의 역할을 기본적으로는 긍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무현 행정부가 진정으로 미국에 대해서 우려하는 것은 따로 있다고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을 ‘미국의 일방적 대북행동’이라고 판단한다. 한국 국민들은 지난 1994년 6월의 첫 번째 북핵위기 당시 클린턴 행정부가 한국을 배제한 상태에서 영변 핵시설에 대한 제한공습 가능성을 검토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한국 국민들은 ‘북한과의 대화노력 지속을 강조했던 클린턴조차 한반도에서의 전쟁 여부를 결정하는데 한국을 소외시키고 일방적으로 행동을 취하려 들었는데, 하물며 북한을 ’악의 추축‘ 운운하면서 국제사회의 반대까지 묵살하면서 이라크와의 전쟁을 밀어붙이려는 부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라는 불안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 국민들의 우려는 분명 근거가 있으며, 마땅히 제기될 수 있는 문제다. 만일 미국이 한국을 소외시킨 상태에서 북한에 대한 일방적 접근-그것이 주한미군 철수와 같은 유화책이든 혹은 대북 선제공격과 같은 강경책이든-을 시도할 경우 한국은 갑작스러운 상황 발생에 대한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증가된 안보상 위협에 노출될 것이며, 이는 한국의 국가생존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것이다. 또한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한미 양국간 공조 자체의 의의(意義)에 대한 근거를 약화시킬 우려가 크다. 따라서 아무리 유사시 미국과의 공조가 북한의 위협에 대한 대처에 필수적이라고 할지라도, 갑자기 한국의 안보위협을 악화시킬 수 있는 미국의 일방적 대북행동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다만 여기서 명심해야 할 점은 미국에 대해서 단순히 강경책 반대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현 상황에서의 일방적 대북행동이 한국의 국가생존은 물론 미국의 국익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신시킬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아직 북한의 핵잠재력이 실체화되는데 적지않은 시간이 필요한 현 시점에서 외교를 통한 평화적 해결의 가능성을 너무 일찍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며, 만일 이라크에 대한 전면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성급히 북한과의 대치상태를 악화시킬 경우 양쪽 전선에서 모두 적성세력과 상대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만일 현 시점에서 성급히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가할 경우 한국 국민들은 물론 3만 7천명의 주한미군 그리고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수많은 미국 민간인들 역시 북한의 보복공격에 대해 무방비 상태에 놓여 생명을 위협받는 등 민주주의 국가로서 국민생명 보호를 우선적 책임으로 하는 미국의 국익에도 배치되는 것임을 상기시켜야 한다. 설령 최후의 수단으로 북한에 대한 경제봉쇄와 무력동원 등 강경책을 써야 할 필요가 분명해진다고 해도 이를 위해서는 국민생명과 국가의 핵심을 보호할 비상대책의 실행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은 한국을 소외시키는 일방적인 대북행동을 통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강조해야 한다. 요컨대 한국은 만일 북한의 핵개발 시도를 저지하기 위한 평화적 해결노력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경우 북한에 대한 강제력 동원과 이를 위한 미국의 역할을 존중하는 대신, 현 시점에서 한국이 주도하는 외교적 수단이 북핵문제 해결의 우선순위에 있으며 미국이 대북정책에 있어서 한국을 소외시키지 않겠다는 점에 대한 미국의 보장을 반드시 얻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노무현 행정부가 주창하는 ‘수평적 한미관계’ 자체를 미국에 대한 반감이나 거부로 판단하고 있는 미국내 일각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오히려 일본이나 영국 등과의 동맹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역할 확대가 동북아에서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확산 그리고 위협세력의 등장 예방이라는 양국간의 공통되는 국익의 실현에 있어서 미국의 부담을 줄이는 등 미국의 국익에 결코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시켜야 한다. * 에필로그 현재 북한의 핵개발 시도를 둘러싼 한반도에서의 갈등양상은 조만간 다음의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 형태로 귀결될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북한이 문제가 되었던 고농축 우라늄 개발여부에 대한 의혹의 해소와 제네바 합의상의 핵동결 및 NPT에 복귀하면서 북한에 대한 중유공급이 재개되는 ‘동결 복귀’. 둘째, 북한이 핵을 비롯한 WMD 개발 및 보유여부에 대한 의혹규명과 더불어 미국 뿐 아니라 한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의 해소에 동의하면서 한국과 미국 등 국제사회가 북한과의 적대관계와 고립해소에 합의하는 ‘근본적 해결’. 그리고 셋째, 북한이 끝내 핵을 비롯한 WMD 잠재력과 한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지속함에 따라 북한에 대한 고립화가 강화되어 한반도에서의 제한적, 혹은 전면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나거나 자체적으로 붕괴되는 방식으로 북한이 몰락하는 ‘파국’. 이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두 번째 경우일 것이며, 첫 번째의 경우도 비록 근본적인 위험의 제거까지는 아닐지라도 당장 시급한 위험을 제거하고 향후 재발할 수도 있는 북한의 문제조장에 한국이 보다 독자적으로 대처할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는 점에서 역시 바람직할 것이다. 세 번째의 경우는 가능한 한 막아야 할 경우지만 현재의 상황을 고려할 때 그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으며, 어떤 경우든 한국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강화되거나 한반도에서의 안보환경을 불리하게 만드는 현상타파가 일어나지 않도록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열쇠는 바로 북한 전체주의 정권의 근본적인 입장변화라고 할 수 있다. 북한에 대한 강경론자 혹은 온건론자의 차이는 단지 북한의 자발적 변화가능성 여부와 북한에 대한 정책수단 등에 대한 것일 뿐이며, 문제해결을 위해 북한의 변화가 우선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점이 없다. 지구상의 그 누구도 북한이 소수 독재정권만의 절대적 기득권을 위해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위협과 갈등을 지속하면서 7천만 민족의 운명을 담보로 가망없는 도박을 벌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 점에 있어서 북한의 태도에 변화가 없는 이상 한반도에서의 평화정착과 냉전구도 해체는 요원할 뿐이며, 한국은 북한이 본질적 변화를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현상타파를 시도할 경우 결코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김재엽 (시민회의 정책실 간사) 출처 - 월간 군사세계 2003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