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정책에서 미국의 악역은 필요하다
	2003-03-11
대북정책에서 미국의 악역은 필요하다 2003년 3월 10일자, 문화일보 보도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9일 청와대에서 여당 지도부와 만찬을 함께 하면서 “한국의 대북 정책은 일관성을 유지해 왔으나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의 입장이 변하는 바람에 독자적인 노선이 불가피해졌다”는 발언을 했다고 전해진다. 만찬 참석자들은 노 대통령이 ”북핵 문제에 대해 한국과 미국의 입장이 똑같을 수 없는 상황에서 겉으로는 이견이 없는 것처럼 쉬쉬하며 가느냐, 아니면 공개적으로 이견을 나타내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있다.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서는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는 언급을 했다고 한다. 사실 취임 이전부터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면 미국과 다를 것은 다르다고 목소리를 낼 수도 있어야 한다”는 의사를 자주 피력해 왔던 노 대통령이었지만, 대북정책에 있어서 ‘독자노선’이라는 용어를 거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 대통령이 언급한 ‘대북 독자노선’이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인지 위의 보도내용만으로는 파악하기가 어렵지만, 언뜻 듣기에는 마치 한국의 역량만으로 대북정책을 추진하겠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으며, 지금까지 계속되었던 미국과의 공조에 의한 대북정책 기조와는 크게 다른 내용으로 들리기 쉽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과연 현재의 상황에서 미국과 구별되는 대북 ‘독자노선’을 편다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노 대통령이 언급한 대북 독자노선이 그 적절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대북정책에 있어 한국과 미국 양측이 공유하는 국가이익(national interests)의 차원과 성격에 큰 차이가 있을 경우이다. 둘째, 한국이 미국 등 주변 우방국가들과의 공조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의 힘으로 북한의 위협에 맞설 뿐만 아니라 북한 정권의 의지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의 수단을 행사할 수 있는 경우다. 우선 대북 정책에 있어 한국은 북한에 의한 군사, 체제상의 위협 해소와 북한과의 인적, 물적교류의 활성화 그리고 남북한 양측간의 평화공존 제도화 등 궁극적인 민족통일을 위한 기반 조성을 추구하고 있다. 한편 미국은 북한이 기존의 통상전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핵 및 생화학무기 그리고 그것의 전달수단(장거리 탄도미사일) 등으로 무장하여 동북아의 안정을 위협하고, 다른 적성국가들이나 테러집단에 이들 대량살상무기가 확산되어 국제질서에서 자국의 주도적 위치와 직접적인 안보가 위협받는 것을 막고자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국은 북한이 만일 위와 같은 문제들에 있어서 신뢰할 수 있는 해결조치를 내린다면,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을 비롯한 ‘과감한 접근’을 통해서 북한을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복귀시켜 국제질서, 특히 동북아질서의 안정을 꾀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는 한편으로 북한을 평화와 협력의 길로 인도한다는 목표에 있어 서로 다를 것이 없으며, 현재 한미 양측이 보이고 있는 갈등은 단지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수단에서의 우선순위에 대한 이견일 뿐인 것이다. 과연 이것이 대북정책에 있어서 ‘독자노선’을 거론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인가? 또한 현재 한국의 역량이 과연 대북 독자노선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경제력을 비롯한 전반적 국력에서 이미 북한을 압도한 점에서 볼 때, 북한이 성의를 보일 경우 그에 따른 보상과 협력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은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북한이 성의를 보이지 않을 경우 그에 따른 불이익을 가하여 북한으로 하여금 한국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도록 유도하는 힘, 즉 강제력에 있어서 아직 한국은 독자적 능력이 부족하다. 바로 이 점이 지난 50년 동안 북한에 대한 전쟁억지력을 미국과의 동맹을 통해 유지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이미 북한이 한국 전체는 물론 일본과 미국 일부까지 대량살상무기로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한 현실에서, 북한의 의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체적인 강제 수단조차도 없이 미국과의 공조가 수반되지 않는 대북 독자노선을 펼치겠다고 하는 것은 핵개발과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대치문제에 있어서 한국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북한의 행태를 고려할 때 그 실효성이 극히 의심될 수밖에 없다. 위와 같은 점들을 종합해볼 때 현 시점에서 만일 한국이 미국과의 공조가 아닌 독자노선에만 의존하는 대북정책을 펼칠 경우 노무현 정부가 지향하는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당면목표의 달성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한미 양국간의 분열을 획책하려는 북한의 사이비 평화, 민족공조 선전전략에 말려들 여지가 크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노무현 정부가 주창하는 ‘수평적 한미관계’ 자체를 미국에 대한 반감으로 오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한국에 대한 미국 내부의 불신만 심화시켜 미국이 유화책이든, 혹은 강경책이든 한국의 안보에 대한 배려 없이 독단적인 대북정책을 강행할 구실을 제공할 우려가 크다. 이것은 노무현 정부가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반대의 결과들인 셈이다. 북한이 한국의 국가생존에 치명적일 수 있는 기존의 군사력에 더하여 핵무기까지 손에 넣으려는 현 시점에서, 또한 한국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북한의 의지에 영향을 가하는데 한계가 있는 상황하에서 그 누군가는 북한이 성의를 보이지 않을 경우에 감당할 수 없는 불이익을 가할 수도 있는 악역을 맡아야만 하는 것이다. 한국을 대신해 미국은 이를 위한 충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스스로 악역을 자청하고 나서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확보 시도에 대한 미국의 단호한 태도를 원망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의 그러한 태도를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대북 외교역량을 강화시키는데 십분 활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노 대통령 스스로도 2003년 3월 5일 영국의 유력지 <더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강경책 자제를 촉구하는 한편으로 “상대에 대한 강력한 위협이 협상의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노무현 정부가 대북정책에 있어서 진짜로 반대하는 것은 강경책 자체가 아니라 미국의 일방적 행동으로 인한 한반도에서의 급격한 상황악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생존에 대한 위협을 저지해야 하는 현 사안의 심각성을 생각할 때 노무현 정부는 미국에 대해 단순히 북한에 대한 강경책을 반대한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만일 미국의 단독 행동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급속히 악화될 경우 한국의 국가생존은 물론 3만 7천여명의 주한미군과 수많은 한국내 미국 민간인들의 목숨까지 위험해지는 등 미국의 국익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와 동시에 한국은 유사시 미국주도에 의한 대북강경책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대신, 현 시점에서는 외교적 수단만이 북핵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최우선수위를 차지해야 하며, 또한 대북접근에 있어 한국을 소외시키는 독자적인 노선을 취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미국으로부터 얻어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미국과의 대화를 통해 이런 것들에 대한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노무현 정부가 주창하는 ‘수평적 한미관계’의 본질인 것이다. 김재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