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적 의혹` 묻어선 안된다
2003-01-21
`국민적 의혹` 묻어선 안된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여러 의혹사건의 운명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4000억원 대북지원설을 비롯하여 공적자금에 대한 비리 의혹, 도청 의혹 사건, 김우중씨 해외 도피 사건, 김대업씨 테이프 조작 사건 등 많은 국민이 해명을 요구하는 사건이 적지 않다. 물론 이들이 충분히 해명되지 않은 채, 과거의 수많은 의혹들처럼 묻혀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또한 적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는 점을 정치권에서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국민의 비판 의식이 무섭게 성장하였다. 정치권력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국민은 그저 순종하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정치권력자들이 국민의 눈을 의식해야 하고, 국민의 의사에 따라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국민이 어떤 심판을 내릴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것이 지난 12월의 대통령선거였다. 현 정부는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 인하여 부담을 덜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 정부는 현 정부의 눈치보다 국민의 눈치를 더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발생할 결과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새 정부는 국민이 해명을 요구하는 의혹들을 묻어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노무현 차기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내정된 문희상씨가 현대상선의 4000억원이 북한에 지원된 것이라는 의혹을 현 정부가 해명하며 차기 정부에 부담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희상씨의 주장 내용 가운데도 문제는 적지 않다. 과거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를 장기간 경험한 때문인지, 우리 정치인들은 ‘통치권의 행사’니, ‘통치자의 결단’ ‘통치 행위’ 등의 주장에 매우 약하다. 대통령을 통치권자라고 지칭할 때에는 (마치 고대 로마제국의 황제라도 대하듯이) 신성불가침의 존재라는 인상을 주고, 통치권 차원의 결단, 통치권의 행사라고 주장할 때에는 (마치 유신 시절의 긴급조치에 대해 그러했듯이) 감히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된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통치행위를 주장하다 보니, 통치행위라고 선언할 경우에는 누구도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식의 논조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어떤 행위가 통치행위에 속하는지의 여부는 당사자가 아닌 사법부에서 판단할 문제다. 어떤 무리한 정책을 추진해 놓고서라도 그것이 통치행위였다는 말 한 마디로 모든 문제를 덮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말 그것이 통치행위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관련 당사자들의 이익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적절한 선택이었는지에 대한 판단이 먼저 내려진 후에 비로소 통치행위성을 인정하고 사법 심사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의혹 자체의 명확한 해명이다. 의혹의 해명 없이는 통치행위인지의 여부도 판단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국민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 납득과 지지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민주정치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돌이켜보면 우리의 경우 정책 결정의 내용으로 인하여 문제가 생긴 경우에 못지 않게 그 결정 과정으로 인하여 문제를 야기한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마땅히 공개해야 할 것을 공개하지 않고 밀실에서 담합으로 해결하고, 밝혀야 할 것은 적당히 덮어 두고 넘어가는 등의 행태가 너무도 많았고, 그로 인하여 문제가 더욱 확대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결과 국정조사권의 발동 및 청문회 개최 등을 통해 온갖 치부가 드러난 경험도 오랜 과거는 아니다. 이제 현 정부는 5년 동안의 임기를 깨끗하게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문제를 수습함에 있어서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이미 선택의 여지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정권 교체 후에 다시금 국정조사나 청문회 등을 통해 해명하도록 만드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현명한 선택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법과 정의에 따라 해결되어야 한다. “법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된다”는 생각은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이회창씨가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해서 그 의미를 상실한 것이 결코 아니다. 장영수 (고려대 헌법학 교수) 출처 - 문화일보 2003. 1. 20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