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는 ‘강아지’가 아니다
	2002-11-26
유권자는 ‘강아지’가 아니다 후보 단일화 대결에서 노무현 후보가 단일 후보로 확정되었다. 오랜 줄다리기 끝에 성사된 단일화인 만큼 노 후보의 성취감과 정 후보의 열패감은 크게 대비를 이룰 것 같다. 이 단일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번 단일화는 ‘인물 단일화’이다. 특히 여론 지지율 2~3위 후보간의 승부였던 만큼 12월 대선에서 과반수 득표를 한 당선자가 탄생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것은 반길 만한 일이다. 그동안 소수 지지에 의한 소수 정권의 한계를 익히 보아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심의 초점은 인물 단일화를 넘어서서 ‘정책 단일화’가 이루어질 것인가에 있다. 실제로 단일화 이전의 TV 토론에서 양자 사이의 정책적 콘텐츠와 이념적 정체성이 확연히 구분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토론 내용을 놓고 따지자면 노무현 후보는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와 가깝고, 정몽준 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선이 상이한 노·정 단일화가 성사된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각기 노 후보와 정 후보를 따르는 유권자들을 생각해 보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사갈 때 집주인은 강아지의 의사를 묻지 않는다. 강아지는 그냥 집주인을 따라갈 뿐이다. 또 신랑과 결혼할 아씨도 몸종의 의사를 묻지 않는다. 몸종은 그냥 결혼하는 아씨를 따라갈 뿐이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강아지나 몸종과는 다르다. 대선에서 그들의 의사, 특히 진정한 의사는 존중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단일화 과정에서 ‘역선택’이라는 생소한 개념이 화두가 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노·정 캠프에서는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단일화 여론조사 과정에 개입하여 쉬운 후보를 고르는 사태를 두려워 했고 이를 역선택으로 규정하였다. 이 ‘역선택’은 좀더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전략적 선택’이다. 유권자들이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신의 진정한 선호와는 다르게 선호를 표출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노인들을 놓고 고려장(高麗葬) 여부에 대하여 투표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노인들은 평소에 “늙으면 죽어야지”하는 말을 되뇌고 있기 때문에 투표를 하면 고려장이 법으로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 또 처녀들이 결혼문제에 대하여 투표를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온다. “시집을 안 가겠다”는 외적 선호를 표출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처녀 결혼 금지법이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처럼 노인들의 전략적 선호에 입각해서 고려장법을 만들고, 처녀들의 외적 선호에 입각해서 결혼 금지법을 만들면 노인들이나 처녀들의 속내와는 다른 선호들이 결집하여 왜곡된 형태의 집단 선택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전략적 선택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실제의’ 대통령이 ‘정신적’ 대통령과 차이가 날 가능성 때문이다. 유권자들이 ‘갑’이라는 후보를 내심으로 좋아하는 데도 ‘을’이라는 후보를 선택하여 대통령이 된다면 실제의 대통령은 유권자들의 진정한 선호에 의한 대통령이 아닌 소수 대통령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전략적 선택이 정당화된다면 투표의 의미는 반감하게 마련이다. 비밀투표도 이 전략적 선택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아니겠는가. 이번 노·정 단일화에서 역선택 방지를 위한 장치는 그런 점에서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에서 정 후보를 이긴 노 후보가 정 후보 지지 유권자들에게 자신들의 원래의 선호와는 다르게 단일화된 후보 쪽으로 표를 행사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이름의 ‘역선택’을 강요하는 셈이다. 노·정 후보의 정치적 정체성과 이념적 정체성이 판이한데, 그것에 관한 심도 있는 조율 과정 없이 무조건 유권자들에게 단일화 후보를 밀어달라는 것은 ‘역선택’을 하라는 자가당착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단일화 단계에서 그토록 역선택을 방지하고자 부심했던 사람들이 단일화가 된 다음에 ‘역선택’을 기대한다면 부조리한 일이다. 인물 단일화는 시작에 불과하다. 정책 단일화와 이념 단일화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우리는 관심있게 지켜볼 것이다. 박효종 (서울대 정치학 교수) 출처 - 조선일보 2002. 11. 26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