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 못살린 외환위기 5년
2002-11-22
`기회` 못살린 외환위기 5년 외환위기를 맞은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이 지났다. 작금에는 제2의 위기가 발생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5주년의 명암을 짚어본다. 우선, 외환위기로 가장 많이 개선된 곳을 꼽으라면 기업 부문일 것이다. 기업은 끊임없는 구조조정과 변신을 통해 수익을 염두에 둔 경영에 치중함으로써 내·외부의 충격에 강해지고 있다. 또 사외이사와 같은 잘못된 제도가 도입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려는 노력도 상당한 진척이 있었다. 민주화 이후에 노동조합의 영향력은 급속히 증대했다.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큰 점은 경제에 결코 플러스로 작용하지 않는다. 선진국에서는 노동조합의 위세가 이미 크게 쇠퇴하여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가 된 사실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노동조합의 실상이 이런데도 위기 이후에 정부는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초법적 기구를 만들어 노동조합의 위세를 온존케 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쟁력 없는 기업을 지원을 통해 살려둠으로써 시장의 힘이 노동조합에 미치는 영향을 차단해왔다. 외국 투자자들이 투자를 가장 저해하는 요인으로 강력한 노동조합을 들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외환위기는 그런 노동조합이 시장의 힘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쇠퇴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노동조합에 관한 한 위기가 기회였지만 정부는 그것을 살리지 못했다. 비록 노동시장이 다소 유연화되는 등의 긍정적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노동조합에 대한 기회와 비교한다면 조족지혈이다. 외환위기 이후에 가장 나빠진 부문이 있다면 화폐와 금융이다. 불황을 돈을 찍어 해결하려는 구태의연한 화폐관리 방식은 외환위기 전후로 변한 것이 없다. 많은 공적자금 투입으로 대부분의 대형 금융기관이 정부 소유가 됐다. 정부 소유란 반자본주의 소유제도로, 그 결과는 너무나 명백한 것이다. 상당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강제에 의한 금융기관간 합병은 결코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정부가 이자율을 낮게 규제함으로써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결정되는 이자율로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경쟁력 없는 많은 기업이 사회의 희소한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다. 노동자의 당장의 일자리를 위해 생명이 연장된 그런 기업은 오랫동안 우리 경제의 큰 장애물이 될 것이다. 한 외국 논평가는 그런 기업을 썩은 시체를 먹고 사는 ‘좀비’라고 혹평했다. 2001년까지 누적 재정적자는 28조원이었고 현재까지 이자와 공적자금 손실은 약 85조∼95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재정적자와 공적자금의 손실이 천문학적으로 크다는 점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공적자금의 투입이 가장 반시장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개인과 기업이 책임져야 할 부분을 모두 정부가 떠안았다는 것은 반자본주의 방식에 의한 위기 해결이다. 혹자는 재정적자와 공적자금이 위기 해결 비용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시장원리에 반하는 정책이나 대책은 언젠가 그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는 것이 역사가 일러주는 교훈이다. 재정적자와 공적자금의 손실은 현재와 미래의 민간 영역을 축소케 한다는 점에서도 크게 우려해야 할 점이다. 현 정부는 의료보험을 통폐합함으로써 보험을 적자에 빠뜨렸다. 그 결과 재정에서의 보조금은 증가해 왔다. 의료보험 통폐합은 간단히 말하면 의료에 사회주의를 도입한 것이었다. 각종 사회보장성 보험이나 연금도 의료보험과 큰 차이가 없다. IMF 관리 체제 직후에 위기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었던 부문은 정부였다. 당시에는 정부를 개혁하고 수없이 많은 규제를 혁파해야 한다는 데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공무원의 숫자는 오히려 늘어났고, 정부가 쓰는 세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 급격히 증가했으며, 경제활동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규제가 늘어났다. 민간의 소득이 크게 감소했다가 이제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데 세금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은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우리는 시장경제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많은 반자본주의 제도를 도입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국가적 관점에서는, 평소에는 도저히 건드릴 수 없는 각종 병폐와 문제 있는 제도를 고칠 수 있다는 점에서 위기가 곧 기회가 될 수 있다. IMF 관리 체제 이후 5년 동안 가장 크게 잃은 것은 바로 그 기회라고 하겠다. 전용덕 (대구대 경제학 교수) 출처 - 문화일보 2002. 11. 21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