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와 민주주의
	2002-11-20
여론조사와 민주주의 여론조사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중대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좋은 약도 남용은 금물인데, 하물며 부작용의 소지가 있는 여론조사를 남발하고 그 결과를 맹신해선 안 된다. 물론 여론조사의 현실적 필요성과 당위적 중요성을 부인할 순 없다. 하지만 여론조사의 문제점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여론조사 숭배자가 되어선 곤란하다. 여론조사 맹신해선 안돼 요즘 한국정치는 여론조사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각종 언론매체가 대선후보 지지도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경쟁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여론이 중시되고 여론조사가 가장 먼저 발달된 미국에서도 이 정도엔 못 미친다. 단순히 여론조사가 너무 많다는 것만이 아니다. 한국정치에서 여론조사는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거나 국민의 의사를 후보들이 정책공약에 반영시키도록 하는 기능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선 구도의 재편에까지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민주당의 여러 의원은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가 떨어졌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이유로 국민경선제의 결과를 무시하고 탈당했다. 애써 도입하고 수많은 국민의 참여로 진행된 국민경선제가 여론조사 결과에 의해 휴지통에 던져졌다. 여론조사의 힘은 이제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간의 단일화를 결정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전화조사에 응답한 수천 명 국민의 의사로 두 명 중 누가 이회창 후보의 상대가 될 지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단일화 방법이 정당화할 수 있을까. 후보 단일화 자체가 명분 있는 일인지 아니면 승리 지상주의에 따른 권모술수인지의 정치적 논란은 차치(且置)하자. 여론조사의 표본추출, 설문작성, 결과해석에 관한 해결하기 어려운 수많은 기술적 문제점도 논외로 하자.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 단일화 방법이 민주주의 원리와 부합하는지의 근본적 문제로만 초점을 맞춰볼 때도 정당성 여부에 큰 물음표가 붙는다. 혹자는 평균 시민의 뜻에 따르는 여론조사 방식이 가장 민주적인 후보결정 방법이라고 말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민주주의를 오해한 소산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단순한 생각이 아닌 국민의 적극적 행동에 의해 작동된다. 국민은 각자 생각을 표출하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행동에 임한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능동적 행동가로 가정되므로, 생각만 품고 행동으로 옮기지 各만？ 의미를 갖지 못한다. 투표에 직접 참여한 국민의 표만 계산되고, 시위 등 단체행동이나 청원 등 개인행동을 한 사람의 목소리가 보다 크게 반영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만약 국민이 피동적 존재로 전락하고 능동적 행동을 안 한다면 민주주의 이상에는 중대한 타격이 가해진다. 여론조사에서 국민은 피동적 존재이다. 스스로 시간을 내고 고민을 한 후 주도적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에서 주어진 질문과 주어진 보기에 수동적으로 답을 한다. 여론조사는 국민의 수동적 생각만 파악할 뿐이지 능동적 행동의 표출 방법이 아니다. 민주주의 이상 퇴색할 수도 수동적이라도 정확하게 국민의 뜻이 확인된다면 사안의 심각성은 덜할 지 모른다. 그러나 여론조사는 국민의 생각을 인위적으로 좁힌다.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국민의 생각이 질문내용에 따라 특정 방향으로 좁혀진다. 다양한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국민이 ‘길들여진다’는 표현도 가능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이상은 퇴색할 수밖에 없다. 근래 한국정치에서 상황논리는 원칙과 명분보다 더 우선되곤 한다. 이번의 후보 단일화 방식도 국민경선제를 할 시간이 없다는 상황논리 때문에 국민의 능동적 행동을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 원칙이 깨지는 또 한번의 경우가 아닌가 씁쓸하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출처 - 한국일보 2002. 11. 20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