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學 이제야 숨쉴 수 있다
	2002-09-12
人文學 이제야 숨쉴 수 있다 지식한국 건설을 위한 기초학문 육성지원 사업계획이 금년 2월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에 의해 공고되고, 그것에 따라 국내 각 대학에서 연구계획서를 제출해 지난달 선정결과가 발표됐다. 1212억원에 달하는 예산 가운데 680억원을 인문학에 지원키로 한 것은 근래에 보기 드문 ‘사건’으로 학계는 받아들이고 있다. 인문학은 그동안 소외됐던 기초학문 중에서도 가장 핵심분야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기초학문이라도 자연과학 분야는 과학재단을 비롯한 여러 방면의 연구비가 있고, 인문학의 응용학문이라 할 수 있는 사회과학 분야도 정부 각 부처나 기업체로부터 용역연구 형식의 연구비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인문학 분야는 학진이 유일한 연구비 제공처였고, 그것도 단독 연구는 몇백만원이 고작이었다. 어쩌다 그것이라도 맡게 되면 큰 행운이지만 1년 뒤에 제출해야 되는 결과보고서에는 강요된 가짜 영수증으로 연구비의 내용을 꿰어 맞춰야 했다. 연구비 집행내역을 거짓으로 꾸미기 싫어서 그것조차도 외면하기 일쑤였다. 그러니 인문학 연구자에게는 거의 연구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수억원씩, 그것도 3년까지 연구비가 제공돼 활기차게 움직이는 주변 동료 교수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은 믿기지 않는 꿈 같은 현실이다. 아주 오랜만에, 고사 위기에 처해있던 인문학도 활기를 얻게 됐다. 억대의 연구비는 공과대학 교수들이나 받는 것으로 여기고 인문학도는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것으로 마음을 접은 지 오래기 때문이다. 이번 학진에 의해 계획되고 처음 시행된 큰 규모의 기초학문 육성 지원 사업이 엄정한 심사과정을 거쳐 큰 잡음 없이 마무리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제야 겨우 장기 침체의 늪속에서 헤매던 기초학문의 정수인 인문학은 그 위기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이 사업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수한 내용의 연구계획서가 철저히 선별돼 지원되고, 다시 성과물에 대한 엄격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연구 결과도 널리 알려져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매사가 그렇지만 기초가 튼튼해야 그 바탕에서 무엇이든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기초체력 훈련의 바탕 위에서 개인기와 팀워크를 조화시켜 월드컵 4강 신화를 현실로 만들 수 있었던 생생한 교훈을 우리는 최근에 경험했다. 그동안 말잔치로 끝나기 일쑤였던 기초학문, 특히 인문학에 대한 육성지원이 이제야 현실로 우리 앞에 다가왔다. 인문학 교수들도 긴 잠에서 깨어나 주변의 젊은 연구인력과 어울려 마음껏 연구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모든 정책이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풍토에서 이 같은 원대한 사업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느냐 하는 점에 걱정과 의구심이 앞선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특히 인본주의에 바탕한 인문학은 결코 일과성 지원으로 육성될 수도 없으려니와 지속적이지 못하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기초학문 육성을 통한 국가 경쟁력의 강화와 지식한국의 건설을 위한 학술인프라 구축을 위해 기초학문 연구인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킨다는 목표는 어느 한 시대, 한 정권의 차원을 넘어선 우리 민족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이다. 그래서 이 같은 사업은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지속돼야 한다. 차기 정권을 담당하려는 대권주자들도 장기적인 기초학문 육성 방안에 관한 미래의 비전과 정책을 청사진으로 제시하고, 그것으로 정권 담당 능력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검증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인문학의 발전은 국가 기초체력을 향상시키는 기간산업이기 때문이다. 전인초 (연세대 문과대학장·국학연구원장) 출처 - 조선일보 2002. 9. 12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