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금년 대선(大選)에서 후보들의 공약을 평가하겠다고 선언했다. 최근 부당한 정치자금 제공 거부 방침을 밝힌데 연이어 터져나온 이번 선언은 재계가 나름대로의 전략에 따라 금년 대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간 시민단체와 노동계의 반(反)기업적 정치활동을 방어하는 차원에 머물렀던 재계의 이러한 행보는 2002년 한국사회가 얼마나 치열한 이해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지 쉽게 짐작하게 해준다.
재계가 어떠한 기준과 과정으로 후보들의 선거공약을 검증할지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립적인 지역분할 구도 속에서 승자와 패자가 갈라졌던 우리네 대선풍토에 비춰볼 때 후보들간의 정책대결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 하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공약의 타당성과 실현가능성에 대한 검토는 뒤로 미루고 우선 유권자들의 표를 받고 보자는 ‘백화점식 선심성 공약’을 남발했고, 그 과정에서 정책의 연속성과 일관성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모든 이해집단을 다 만족시키는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운다면 이들 공약간에 충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과거 우리의 후보들은 이런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무시했다. 사전에 철저한 검증과정을 거치지 못한 공약들은 일단 그 후보가 청와대에 들어가면서부터 집권기간 내내 족쇄와 부담으로 작용한다.
흔히들 ‘모든 대선 공약을 지키려는 대통령은 어리석다’거나 ‘모든 공약을 믿을 만큼 몽매한 유권자들도 없다’고들 말은 한다. 하지만 갈등 조정능력이 미약한 한국적 상황 속에서 공약을 쉽게 내팽개치기도 간단치 않다.
재계가 선거공약을 검증한다면 그 잣대는 「시장경제의 창달」이 돼야 할 것이다. 현 정권이 들어선 뒤 각종 경제개혁이 진행돼 왔으나 경제활동의 자유를 최고로 신장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조성되지 않았다는 게 재계의 불만인 것 같다.
한국사회는 현재 교육, 노동, 규제 개혁 등 사회 기간분야에서 정치적인 논리에 휘말려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마비상태를 보이고 있다.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적대적인 규제(規制)제도의 도입, 지식기반경제가 요구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와는 거꾸로 가는 경직적인 노무제도 등은 재계가 지적하는 불만 사항이다. 따라서 선거공약 검증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반영되도록 하는 작업은 바람직해 보인다.
문제는 대선공약 검증이 반드시 후보간의 정책경쟁을 유도할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아직까지도 지역대결 구도가 대선 결과를 가름한다고 후보들이 믿는 한, 선거공약은 차별화되지 못한 채 백화점식으로 나열될 가능성이 크다. 원론적으로 시장경제 제도의 발전을 수용하지 않을 대선후보가 어디 있겠으며, 현재 재계가 불만을 표시하는 규제제도나 노동관련 제도에 대해서도 듣기좋은 얘기들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공약검증 과정을 통해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정책대결을 유도할 것인지가 논의의 핵심이 돼야 한다. 재계 입장에서는 특정 공약이 실현되는 경우 예상되는 효과와 부작용, 그 공약을 집행하기 위해 확보돼야 하는 재원의 규모와 바뀌어져야 하는 제도개편의 어려움, 그리고 서로 충돌하는 공약간의 우선순위 등을 검증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또 재계는 대선후보들의 공약을 검증한 자료를 내부용으로만 사용할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으나 자칫하면 투명성 논란이나 특정후보 지지 시비에 휘말려 안하느니보다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인 기준이 아닌 재계 스스로가 납득할 만한 기준과 방법을 대외적으로 공표하고 후보들간의 비교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유권자들의 합리적인 선택을 도와줄 것이다.
이번 재계의 선거공약 검증 시도가 서로 다양한 이익집단간의 공약검증 경쟁을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한걸음 더 진보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財界 공약검증 基準 밝혀야
재계가 금년 대선(大選)에서 후보들의 공약을 평가하겠다고 선언했다. 최근 부당한 정치자금 제공 거부 방침을 밝힌데 연이어 터져나온 이번 선언은 재계가 나름대로의 전략에 따라 금년 대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간 시민단체와 노동계의 반(反)기업적 정치활동을 방어하는 차원에 머물렀던 재계의 이러한 행보는 2002년 한국사회가 얼마나 치열한 이해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지 쉽게 짐작하게 해준다.
재계가 어떠한 기준과 과정으로 후보들의 선거공약을 검증할지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립적인 지역분할 구도 속에서 승자와 패자가 갈라졌던 우리네 대선풍토에 비춰볼 때 후보들간의 정책대결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 하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공약의 타당성과 실현가능성에 대한 검토는 뒤로 미루고 우선 유권자들의 표를 받고 보자는 ‘백화점식 선심성 공약’을 남발했고, 그 과정에서 정책의 연속성과 일관성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모든 이해집단을 다 만족시키는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운다면 이들 공약간에 충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과거 우리의 후보들은 이런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무시했다. 사전에 철저한 검증과정을 거치지 못한 공약들은 일단 그 후보가 청와대에 들어가면서부터 집권기간 내내 족쇄와 부담으로 작용한다.
흔히들 ‘모든 대선 공약을 지키려는 대통령은 어리석다’거나 ‘모든 공약을 믿을 만큼 몽매한 유권자들도 없다’고들 말은 한다. 하지만 갈등 조정능력이 미약한 한국적 상황 속에서 공약을 쉽게 내팽개치기도 간단치 않다.
재계가 선거공약을 검증한다면 그 잣대는 「시장경제의 창달」이 돼야 할 것이다. 현 정권이 들어선 뒤 각종 경제개혁이 진행돼 왔으나 경제활동의 자유를 최고로 신장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조성되지 않았다는 게 재계의 불만인 것 같다.
한국사회는 현재 교육, 노동, 규제 개혁 등 사회 기간분야에서 정치적인 논리에 휘말려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마비상태를 보이고 있다.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적대적인 규제(規制)제도의 도입, 지식기반경제가 요구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와는 거꾸로 가는 경직적인 노무제도 등은 재계가 지적하는 불만 사항이다. 따라서 선거공약 검증을 통해 정당한 주장이 반영되도록 하는 작업은 바람직해 보인다.
문제는 대선공약 검증이 반드시 후보간의 정책경쟁을 유도할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아직까지도 지역대결 구도가 대선 결과를 가름한다고 후보들이 믿는 한, 선거공약은 차별화되지 못한 채 백화점식으로 나열될 가능성이 크다. 원론적으로 시장경제 제도의 발전을 수용하지 않을 대선후보가 어디 있겠으며, 현재 재계가 불만을 표시하는 규제제도나 노동관련 제도에 대해서도 듣기좋은 얘기들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공약검증 과정을 통해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정책대결을 유도할 것인지가 논의의 핵심이 돼야 한다. 재계 입장에서는 특정 공약이 실현되는 경우 예상되는 효과와 부작용, 그 공약을 집행하기 위해 확보돼야 하는 재원의 규모와 바뀌어져야 하는 제도개편의 어려움, 그리고 서로 충돌하는 공약간의 우선순위 등을 검증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또 재계는 대선후보들의 공약을 검증한 자료를 내부용으로만 사용할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으나 자칫하면 투명성 논란이나 특정후보 지지 시비에 휘말려 안하느니보다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인 기준이 아닌 재계 스스로가 납득할 만한 기준과 방법을 대외적으로 공표하고 후보들간의 비교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유권자들의 합리적인 선택을 도와줄 것이다.
이번 재계의 선거공약 검증 시도가 서로 다양한 이익집단간의 공약검증 경쟁을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한걸음 더 진보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출처 - 조선일보 기고 2002. 3. 6
* 위 글의 내용은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