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의연한 危機관리
	2002-09-10
구태의연한 危機관리 태풍 루사가 지나간 자리에 천문학적 규모의 피해액이 눈덩이처럼 불어가고 있다. 바로 이웃의 불행은 알지 못해도 신문과 TV 덕분에 수해 지역의 엄청난 재난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음은 현대성의 역설인 듯하다. 대중매체를 통해 정보의 형태로 체감하는 간접 경험은 현장의 수재민보다 수해 상황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지 않던가. 이제 우리도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라 규정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경고를 경청할 때가 온 것 같다. 벡 교수의 ‘위험사회론’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위험사회란, 현대사회의 구조적 특성상 위험을 야기하는 요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함은 물론, 위험의 성격 자체가 질적으로도 의미있는 변화를 겪고 있음을 의미한다. 현대사회의 위험은 9·11 테러의 공포 전염, 세계 주식시장의 동반 급락, 환경공해의 전 지구적 확산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위험의 여파가 위험 발생 지역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파장이 가속화되어 세계적 규모로까지 확대되어 가는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다. 태풍 루사의 피해 상황을 지켜보자니, 우리 현실은 이미 위험사회로 깊숙이 진입했음에도 현실 인식은 이에 미치지 못함으로써 위기관리 능력이 위험수위에 달한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 위기관리 능력의 미숙함은 연일 태풍 루사의 피해 상황을 보도하는 데 전력을 다해온 신문과 방송의 구태의연함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났다. 끊어진 철로, 유실된 도로, 떠밀려온 쓰레기 더미, 논과 밭을 뒤덮은 흙탕물 바다, 뻘건 흙물을 뒤집어쓴 가재도구, 산사태로 파손된 집과 몰살된 가족을 담은 모습은, 태풍 루사라는 고유명사를 제외한다면 화면이나 지면만으로 이번 태풍 피해가 수년 전의 극심했던 태풍 피해와 어떻게 다른지 구분이 어려웠다. 위기 대처방식 또한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주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수해지역을 방문한 고위 정치인이나 수해 복구 현장에서 땀 흘리는 군인들의 모습은 물론이요, 수해 주민을 돕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자원봉사자들의 미담과 따뜻한 온정의 손길이 끊이지 않았던 불우이웃 돕기 성금 모금은 이번에도 여전히 단골메뉴로 등장했다. 물론 이웃의 불행에 동참하려는 따뜻한 휴머니즘은 시대가 바뀌어도 고귀한 가치로 인정받아 마땅할 것이요, 십시일반(十匙一飯)의 미덕은 아름다운 전통으로 이어간다 해서 해될 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위험 수위가 점차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여전히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에 의존하거나 아직도 가족과 이웃을 향한 온정에 의지하는 건, 진정 위험 불감증의 전형적 표현에 다름아니라는 생각이다. 다양한 위험에 우리 모두가 민감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우리네의 전통적 삶의 양식이 상대적으로 위험에 덜 노출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 위험이 닥칠 경우라도 가족과 이웃이 합심해서 그런대로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해 왔기에, 돌다리도 두드려보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전통보다는 닥치면 다 해결하게 되어 있다는 특유의 낙관주의와 순발력이 우리의 규범으로 정착되어 왔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세계화다 정보화다 외치는 동안 사회구조적 토대가 전면적으로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구태의연한 의식이 우리의 삶을 발목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개인에게 닥칠 위험 가운데는 질병보다 재해가 위협적일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서구 복지국가에서는 개인적 차원에서 포괄적 사회 안전망을 구축함으로써 언제라도 닥칠 위험에 대비하는 동시에, 사회적 차원에서도 위기관리 능력을 제도화하는 노력을 진행 중에 있다. 가족과 이웃의 합심만으로는 위기 극복이 불가능하게 된 사회, 닥치면 해결되겠지 하는 여유를 불허하는 사회, 우리도 다가온 위험사회를 관리해갈 국가적 차원의 노력을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출처 - 조선일보 2002. 9. 10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