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싸움인가
2002-08-16
무엇을 위한 싸움인가 몇년 전 경제위기가 있었을 때 나는 경제학 전공 선생님들에게 "경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머리 좋은 경제학자들은 다 뭐하고 있었던 거예요"라고 농담아닌 진담을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마치 보복이라도 받듯이 어디를 가나 "언론이 이 지경이 되도록 도대체 언론학자들은 다 뭐하고 있는 거예요"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언론사간 반목.제소 급증 언론학 교수로서 요즘처럼 나의 전공에 대해 회의를 느껴본 적이 없다. 신문을 보나 방송을 보나 내가 배워왔고 가르쳐왔던 원칙이나 정도와는 너무 거리가 먼 현실에 절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몇년간 언론중재위원으로 봉사하면서 우리 언론의 오보와 불공정 보도로 인한 피해와 구제의 현실을 경험할 수 있었다. 사실 오보와 불공정 보도로 개인이나 기관이 피해를 보게 되면 몇줄의 정정이나 반론보도로는 그 피해가 충분히 구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론보도조차 선뜻 내주려 하지 않는 것이 우리 언론의 현실이다. 물론 언론사나 언론인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중재과정에서 나는 국민의 알권리를 위임받았다는 오만한 사고와 면책특권을 부여받았다는 착각에 빠져 외부의 비판을 무시하는 언론의 오만과 편견을 볼 수 있었다 힘없는 시민들에게는 간단한 반론보도조차 꺼려하는 언론사들이 오히려 자사가 타사로부터 본 피해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구제를 받아내려고 하는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보인다. 물론 언론사들간의 모니터링과 비판은 정상적인 언론활동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들의 이념이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일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이런 관점에서 사실 언론사간의 제소가 늘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갈등의 양상도 상당히 심각하다는 사실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요즘 한창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 연예계 비리 수사에 관한 방송사들의 보도를 보면 그런 치졸함을 볼 수 있다. 초동 수사에서 뉴스의 초점이 됐던 방송사가 나중에 다른 방송사들도 걸려들자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 그 방송사들의 로고를 클로즈업시켜 수초동안이나 내보내는 것을 보았다. 시청자들을 무엇으로 보기에 이런 오기를 부린단 말인가. 방송대 신문, 방송대 잡지와 같은 매체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같은 업종에서는 메이저와 마이너 신문사들과의 싸움과 방송사들간의 싸움도 치열하고 치졸하다. 공정한 경쟁이라기 보다 전투에 가깝다보니 진실을 확인해야 하는 정도를 버리고 오보를 내더라도 독자의 관심을 끌고 보자는 막가파 신문이 있는가 하면, 살인현장 화면을 그대로 내보내는 무책임한 방송사도 있다. 타사가 자신을 비난하면 불공정 보도, 왜곡.편파보도이고, 자신이 타사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미디어 비판이라는 오만한 생각이 지금 우리의 언론을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진흙탕 싸움에 끼어들어 어떻게든 이익을 도모하려는 정치세력들이 있게 마련이다. '내편' '네편'으로 편을 가르고 음모니 음해니 하고 언론사에 시비를 부친다. 정치발전을 위해서도, 언론의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이런 편가르기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정치적 불신과 냉소주의가 팽배한 최근의 상황을 볼 때 문제의 심각성을 새롭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뜨거운 감자가 될 MBC에 대한 국정감사가 우리 언론을, 정치를, 그리고 우리 국민을 심각한 갈등과 혼란으로 빠뜨리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오만 드러낸'미디어 비판' 대선을 앞두고 가뜩이나 혼미한 정치적 상황에서 이 시대의 요구를 감지할 수 있는 언론의 예리한 통찰력과 자기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언론이 가장 우선적으로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권력자도 아니고 사주도 아닌 시민들이다. 뉴스 전달의 속도.기술.특성이 바뀌어 언론의 면모는 바뀐다해도 진실을 알려 민주사회를 유지할 수 있게 시민들의 자치능력에 필요한 정보를 주는 언론인의 책임과 특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언론인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언론이 있으며 왜 그 직업에 종사하는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진흙탕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언론은 정치에, 정치는 언론에 발목을 잡혀 둘 다 한발짝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난국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崔善烈 (이화여대 교수 언론홍보영상학부) 출처 - 중앙일보 2002. 8. 16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