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과 자유주의
	2002-07-08
월드컵과 자유주의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는 말에 중학생 아들은 “월드컵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다.”라는 즉각적인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월드컵 4강 진출이 아들의 자의식을 바꾸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한국인인 자신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자신에 대해 이전과 다른 ‘느낌’을 갖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훌륭한 국사책이나 교사가 심어주지 못한 한민족의 자부심을 월드컵이 하루아침에 심어준 것입니다. 월드컵 4강 진출보다 이러한 의식의 전환이 더욱 놀랍습니다. 월드컵 4강 진출을 칭송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상찬의 말은 이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월드컵 4강 진출을 묘사하기 위해 ‘기적’ ‘신화’ ‘전설’과 같은 강도 높은 말을 다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국정 최고 책임자는 4강 진출이 확정되던 날 “단군이래 가장 행복하다.”라고 하여 외국인들은 단군이 누구인가에 더 관심을 쏟았다고 합니다. 내 평생 제일 행복한 날이 아니라 단군이래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한 것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좋은 날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국민 대부분이 이러한 행복한 감정을 동시에 느낀 것은 단군이래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아름다운 추억은 이제 민족적 자산이 되었습니다. 월드컵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지난 6월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월드컵은 축구만은 아니다 축구와 현실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축구에서 우승한 국가가 그렇지 않은 국가보다 여러 면에서 우월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결승전에서 브라질 국가 대표팀이 독일 대표팀을 이긴 것이지 브라질이 독일을 이긴 것도 아니고, 브라질 국민의 자질이 독일 국민의 자질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입증한 것도 아닙니다. 축구는 단지 축구일 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4강 진출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월드컵은 우리에게 축구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의 축구가 변하고, 우리의 의식이 변했습니다. 우리 축구의 변한 모습을 보고, 다른 무엇을 느끼고 체험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월드컵을 단순한 축구로 볼 수만은 없습니다. 한국 축구의 변화가 한국 사회 전반의 변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우리의 월드컵 체험은 마음과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경험은 좋은 교사이며,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단군이래 가장 기쁜 경험을 하였다면 단군이래 가장 큰 변화가 올 수도 있습니다. 기쁜 경험은 사람을 더욱 크게 변화시킵니다. 국민 모두가 기쁜 경험을 하였다면 분명히 사회 전체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그냥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월드컵의 메시지를 제대로 알고 그 메시지를 확산시키고, 국민들 하나 하나가 그것을 체현할 때 역사에 큰 변화가 올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 축구의 비약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 무엇인가를 밝혀낼 수 있다면 그 원리를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사회, 정치, 경제, 교육 부분에 산적해 있는 문제점을 유발한 원인을 찾아내고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습니다.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 생각의 코드나 문화의 코드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하멜과 히딩크 축구 변화의 중심에는 히딩크가 있습니다. 한국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을 우리가 이렇게 칭송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외국인에게 친밀감과 존경심을 갖게 된 것은 월드컵 4강 진출이 가져다준 선물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我와 非我’, ‘우리의 것’과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아서 우리의 것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을 배척하여 왔습니다. 히딩크를 우리로 느끼는 것인지,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과 적개심이 사라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우리가 아닌 것에 대한 태도가 변한 것은 분명합니다. 히딩크는 ‘히딩크 신드롬’을 창출하면서 우리 사회의 ‘벤처 마킹’이 되었습니다. 그는 ‘축구에서 배우자’, ‘히딩크에게서 배우자’라는 새로운 구호를 만들면서 국민의 스승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350년 전 히딩크의 나라에서 표류해 온 하멜은 한국인들은 서로 믿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인다고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를 야만인이라 불렀습니다. 그의 후예 히딩크는 “한국 선수들은 한결같이 착하고 순수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선수들은 세계 어느 선수들보다 우월하다. 나는 한국 선수들을 대단히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글로벌리즘과 경쟁 하멜과 히딩크의 차이는 지역주의와 글로벌리즘의 차이입니다. 히딩크의 승리는 글로벌리즘의 승리입니다. 지역주의가 단합을 조장한다면 글로벌리즘은 경쟁을 유도합니다. 우리는 경쟁과 협력을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경쟁을 나쁜 것이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월드컵은 경쟁과 협력은 하나의 현상을 기술하는 다른 언어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경쟁이 없는 곳에서는 진정한 협력도 있을 수 없습니다. 경쟁 없는 협력은 가치 있는 것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경쟁 뒤에는 승리와 패배가 있습니다. 우리가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다면 패배의 쓴맛을 본 사람들도 있습니다. 경쟁의 세계는 비정합니다. 우승 후보 팀이 하루아침에 탈락하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팀이 승승장구하기도 합니다. 일류가 삼류가 되고 삼류가 일류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승부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비정함은 축구 선수들의 역량을 발전시키고 궁극적으로 축구의 발전을 가져옵니다. 경쟁과 승부의 세계를 비정하거나 비윤리적이라 하여 피하는 사람은 승리의 환희를 맛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발전의 계기를 갖지 못합니다. 개인이나 사회나 경쟁을 통해서 자기의 잠재적 능력을 계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쟁을 통해 더 나아지겠다는 욕망을 버리는 사람은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결국 몰락하게 됩니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수들이 어떻게 세계의 일류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비밀은 바로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비밀이기도 합니다. 월드컵에서 1승도 못하고 헤매던 우리 팀이 일정 기간의 훈련을 거쳐 4강에 진출한 것은 경쟁 세계의 질서 때문입니다. 이 질서는 우리 팀에게 4강 진출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가져다주었고, 우리 국민들에는 나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하면 된다’, 모든 것은 인간의 노력에 달렸다는 범상한 지혜를 우리는 오랫동안 잊고 살아 왔습니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믿을 만한 것인가 그렇지 못한 것인가를 논리적으로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은 논리로 분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감은 자기 책임의 원칙을 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자신감의 상실은 피해 의식에 젖게 하고, 모든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려는 윤리적 무책임성을 유발합니다. 히딩크는 감독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자신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입니다. 자기 능력과 자기 믿음이 분명하고 강해야 합니다. (자신감은) 주어진 목표를 향해 매진할 수 있는 추진력입니다. 물론 전제가 있습니다. 마땅히 감독의 귀는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하는 말들을 모두 성실히 귀담아 듣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감독은 소신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감이 있을 때 일을 할 수 있는 열정도 가지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됩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존중할 수 있고 자기 소신을 유지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감은 자율에서 나옵니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 선발에 관한 한 전권을 위임 받는다는 확약을 받고 대표팀을 맡았다고 합니다. 그는 연고, 파벌, 외부적 힘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공정하게 선수를 선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원칙과 규칙이 지배하는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말하기는 쉽지만 실현하기 어려운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히딩크는 조직 하나 하나, 개인 하나 하나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때 국가가 힘을 키울 수 있다는 일깨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학연, 지연, 혈연보다 능력, 자율과 책임의 원칙, 끊임없는 경쟁, 자신의 열정과 끈기, 기존의 고정 관념과 불문율 타파 등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우리는 히딩크의 리더쉽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낙하산 식이나 지연과 학연에 얽매인 선수 선발, 주먹 구구식 훈련, 끊임없는 상부와 외부의 간섭이 있었다면 결코 그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월드컵 4강 진출을 기점으로 이러한 공감대가 사회 전역으로 확산되어 우리 사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길 기대해 봅니다. 사회 전반에서 로컬 스탠더드(local standard)의 자리를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가 차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 전반에 ‘혁명적인 의식 변화’가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민족과 국가를 넘어 시장으로 월드컵은 민족 단위가 아니라 국가 단위의 경쟁이지만 우리의 의식 속에는 국가가 아니라 민족이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월드컵 4강 진출을 가능하게 한 요인 가운데 하나인 히딩크의 영입은 민족과 국가를 넘어 시장을 선택한 것입니다. 곧 자유주의적 시장의 선택이었습니다. 우리는 월드컵 4강 진출을 계기로 민족이나 국가를 넘어 시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민족이나 국가가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잔치는 끝났습니다. 잔치가 끝나면 잔치집에 모였던 사람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듯이 이제 우리는 각자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월드컵을 계기로 자율과 자신감이 우리 사회의 근본 가치로 자리 잡기를 희망해 봅니다. 자율과 자신감은 자유주의의 근본입니다. 신중섭 (강원대 교수, joongsop@kangwon.ac.kr) 출처 - 자유기업원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