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후보의 비전
	2002-07-08
대통령 후보의 비전 대선 후보들의 지지도가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선거 전문가들의 발걸음도 바빠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분석을 보면 지역정서니 합종연횡이니 하는 판에 박은 얘기가 대부분이다. 유권자들의 투표 성향은 대체로 고정돼 있고 이를 가장 슬기롭게 나눠 갖는 사람이 이긴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칫 후보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차라리 길에서 아무나 붙잡고 지금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고 묻는 편이 나을 수 있다. 민생 살릴 청사진 있나 사실 지연이나 학연 따위가 선거의 주요 변수로 등장하는 것은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해 후보들간에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후보가 내 가족의 후생을 높여줄 것이라는 확신이 선다면 과연 출신 지역이 그렇게 문제가 될까. 정치인들 스스로가 조장한 편견 때문에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연줄이나 따지고 사소한 일로 마음을 바꾸는 염치없는 사람들로 전락되는 것이다. 이회창 후보가 고급 빌라에 산다는 사실만으로 유권자들이 등을 돌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지 몇 해가 넘어가는 데도 민생을 위한 딱 부러진 청사진을 내놓지 못한 데 대한 실망감이 이 사건을 계기로 표출된 것이 아니었을까.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가 떨어진 것을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연합 제의를 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이회창 후보가 신선감을 잃고 구시대의 정치 행태를 답습하는 듯 보이던 차에 5공 청문회에서 국민의 마음을 파고 들었던 패기 있는 정치인이 등장했으니 마음이 쏠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올라간 지지율은 관심의 표현이지 확신의 증거는 아니었다. 그 뒤 노무현 후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제대로 된 비전을 내놓는 일에 소홀했다. 자신이 뜨거운 가슴을 지녔다는, 이미 다 아는 사실을 지나치게 반복해 강조하거나 정제되지 않은 경제 공약을 섣부르게 말해 냉소를 자초한 것은 답답한 일이었다. 경제를 살리고 서민의 삶을 향상시킬 설득력 있는 계획을 가지고 차근차근 유권자들의 가슴을 파고 드는 후보라면 YS가 아니라 3金과 동시에 동거를 한 들 누가 말리랴.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정치기술만으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된 정치인들이 당선 후 얼마나 실망스러운지를 이미 충분히 보았다. 때문에 새로운 후보들에게선 다른 면모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핵심적인 문제는 외면하고 구태의연한 방식에 의존해 선거를 치른다면 표를 얻기 힘들 것이다. 지지율이 떨어진 후보는 유권자가 자신을 떠났다고 여기겠지만, 정작 후보 스스로가 유권자 곁에서 멀어진 것이라 보는 것이 옳다. 이제 대선 열기가 본격화하면 늘 그랬던 것처럼 백화점식 선거 공약이 쏟아져 나오고 각종 판세 분석은 지연.학연.세대차 등으로 뒤범벅이 될 것이다. 글쎄, 과연 이런 고정적 변수들이 승부의 갈림길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몇달 전 필자는 본란을 통해('대통령 선거의 변수들', 2001년 11월 19일자) 이번 대선은 출신 지역이나 소속정당보다는 미래지향적인 인물 공방이 결정 변수가 될 것이라 예측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 지금처럼 이념정당이 부재하고 경제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인물 변수는 단순한 호감도의 차원을 넘어 지도자의 비전과 실력을 가늠하는 도구가 된다. 따라서 후보의 말 한마디도, 대수롭지 않은 처신 하나도 상징성을 지닌다. 票心은 후보자 하기나름 비전은 추상적 개념의 나열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서 유권자의 마음을 찡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려면 수사와 장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럴 신념과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번 선거는 어쩌면 1백개의 공약을 내세우는 측보다 한두개의 약속으로 유권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후보가 이길지 모른다. 무엇이 결정적인 사안이 될지는 선거참모가 아니라 유권자들에게 직접 물어볼 일이다. 지금은 공허한 정치산술이나 특색없는 공약제조로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다.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는 12월이 다가오고 있다. 全周省(이화여대교수·경제학) 출처 - 중앙일보 2002. 7. 8 중앙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