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특수라는 말이 있다. 월드컵은 개최기간이 올림픽보다 길고 600억 인구가 TV를 시청하기 때문에 이것을 이용하면 최고의 홍보효과를 얻을 수 있다. 때문에 정부는 정부대로, 매스컴은 매스컴대로 월드컵이 IMF 외환위기 이후 침체된 한국의 경기국면을 완전히 극복할 요술방망이인 것처럼 여기면서 국민 모두가 여기에 ‘동참’하고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에 동참하고 어떻게 협조하라는 말인가? 아무리 월드컵이 결과적으로 돈이 된다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돈’을 강조할 때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쉽다.
언젠가 서울운동장에서 민속놀이를 관람하면서 무척 지루해하던 적이 있었다. 원래 민속놀이는 여럿이 어울려 놀면서 나온 것이다. 이런 놀이를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자니 당연히 지루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옆의 친구가 재미있게 컴퓨터 게임하는 모습을 팔짱끼고 서서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운동장에서 축구를 관람하는 것도, 누구나 참여하는 놀이를 관람하라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그러나 실제로 월드컵 경기는 이런 모순점을 적절히 보완하고 있다. 우선 아나운서와 해설자의 등장이 그것이다. 아나운서는 선수들의 행동을 무성영화관의 변사처럼 낱낱이 이야기해 준다. 골을 넣었을 때는 정말 기쁜 듯 목소리를 높이고 골을 놓쳤을 때는 정말 안타까운 듯 소리를 질러대면서 축구를 보는 시청자들의 입장에서 감정이입을 한다. 경기를 보고 있노라면 이들이 마치 소설 속의 스토리텔러나 판소리의 창자(唱子)와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들에 의해서 관객은 저절로 경기에 몰두하게 된다.
물론 관객도 그냥 보고 있지는 않는다. ‘붉은악마’라는 응원단은 빨간 티셔츠를 맞춰 입고 페이스페인팅을 한 채 스스로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노래 부르고 춤추며 손에 손을 잡고 그 공간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민속의상을 입고 자기 나라 팀을 응원하는 것은 기본이고 민속악기, 멋진 춤솜씨는 경기의 재미를 더하게 한다.
경기장 밖의 응원도 재미있다. 축구경기는 여럿이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축구카페 같은 데서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손뼉치고 같이 노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축구경기를 빙자하여 우리들끼리 한판 잔치 벌인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별로 관계도 없는 나라면서도 사람들끼리 편 갈라서 목이 쉬도록 응원하는 이유는 재미있게 놀기 위해서다.
그렇다. 월드컵은 세계인이 참여하는 잔치이며 놀이다.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강요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축구장이라는 좁은 놀이공간은 발달된 미디어에 의해 도시 밖으로, 전국으로,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시내 곳곳의 대형 전광판과 세계에 방영되는 위성방송으로 우리의 일상의 공간은 삽시간에 놀이공간으로 변모한다. 그뿐인가! 베컴의 닭 벼슬머리와 토티의 바람머리는 지금 젊은이들의 헤어스타일을 선도하고 있고, 스타들이 착용하는 시계나 귀고리, 선글라스가 한국의 패션계를 강타하고 있다. 젊은 여성들이 난데없이 축구화를 신고 대로변을 활보하니 이제 사람들은 세계의 축구장화(蹴球場化), 전 인류의 축구선수화를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판이다. 이제 축구라는 놀이는 우리의 일상과 제도, 문화 전반의 화두다.
월드컵은 놀이공간과 생활공간, 노는 것과 일하는 것, 노는 것과 배우는 것, 노는 것과 돈 버는 것의 구분이 모호해져 버린 이 시대의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例)다. 그러니 이제 대답은 자명하다. 과거 새마을운동 하듯 월드컵 특수에 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같이 참여하여 놀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그럴 수 있는 문화적 기반을 평소에 만들어 두는 것, 여유를 가지면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허리띠를 졸라매지 말고 탕진해야 한다. 낭비해야 한다.
여가 시간을 희생해가며 먼지 낀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기 이전에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인생을 즐길 수 있을까 궁리해야 한다. 나의 즐거움은 돈으로 따질 수 없이 소중하다. 그래서 그것을 돈으로 환산할 때 엄청난 부가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노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돈, 한국의 문화산업은 이제 여유를 가져야 한다.
(최혜실/KAIST(한국과학기술원) 교수·국문학) 출처 - 조선일보 2002. 6. 8 문화비전
놀이와 일과 삶과 돈
월드컵 특수라는 말이 있다. 월드컵은 개최기간이 올림픽보다 길고 600억 인구가 TV를 시청하기 때문에 이것을 이용하면 최고의 홍보효과를 얻을 수 있다. 때문에 정부는 정부대로, 매스컴은 매스컴대로 월드컵이 IMF 외환위기 이후 침체된 한국의 경기국면을 완전히 극복할 요술방망이인 것처럼 여기면서 국민 모두가 여기에 ‘동참’하고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에 동참하고 어떻게 협조하라는 말인가? 아무리 월드컵이 결과적으로 돈이 된다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돈’을 강조할 때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쉽다.
언젠가 서울운동장에서 민속놀이를 관람하면서 무척 지루해하던 적이 있었다. 원래 민속놀이는 여럿이 어울려 놀면서 나온 것이다. 이런 놀이를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자니 당연히 지루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옆의 친구가 재미있게 컴퓨터 게임하는 모습을 팔짱끼고 서서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운동장에서 축구를 관람하는 것도, 누구나 참여하는 놀이를 관람하라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그러나 실제로 월드컵 경기는 이런 모순점을 적절히 보완하고 있다. 우선 아나운서와 해설자의 등장이 그것이다. 아나운서는 선수들의 행동을 무성영화관의 변사처럼 낱낱이 이야기해 준다. 골을 넣었을 때는 정말 기쁜 듯 목소리를 높이고 골을 놓쳤을 때는 정말 안타까운 듯 소리를 질러대면서 축구를 보는 시청자들의 입장에서 감정이입을 한다. 경기를 보고 있노라면 이들이 마치 소설 속의 스토리텔러나 판소리의 창자(唱子)와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들에 의해서 관객은 저절로 경기에 몰두하게 된다.
물론 관객도 그냥 보고 있지는 않는다. ‘붉은악마’라는 응원단은 빨간 티셔츠를 맞춰 입고 페이스페인팅을 한 채 스스로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노래 부르고 춤추며 손에 손을 잡고 그 공간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민속의상을 입고 자기 나라 팀을 응원하는 것은 기본이고 민속악기, 멋진 춤솜씨는 경기의 재미를 더하게 한다.
경기장 밖의 응원도 재미있다. 축구경기는 여럿이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축구카페 같은 데서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손뼉치고 같이 노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축구경기를 빙자하여 우리들끼리 한판 잔치 벌인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별로 관계도 없는 나라면서도 사람들끼리 편 갈라서 목이 쉬도록 응원하는 이유는 재미있게 놀기 위해서다.
그렇다. 월드컵은 세계인이 참여하는 잔치이며 놀이다.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강요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축구장이라는 좁은 놀이공간은 발달된 미디어에 의해 도시 밖으로, 전국으로,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시내 곳곳의 대형 전광판과 세계에 방영되는 위성방송으로 우리의 일상의 공간은 삽시간에 놀이공간으로 변모한다. 그뿐인가! 베컴의 닭 벼슬머리와 토티의 바람머리는 지금 젊은이들의 헤어스타일을 선도하고 있고, 스타들이 착용하는 시계나 귀고리, 선글라스가 한국의 패션계를 강타하고 있다. 젊은 여성들이 난데없이 축구화를 신고 대로변을 활보하니 이제 사람들은 세계의 축구장화(蹴球場化), 전 인류의 축구선수화를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판이다. 이제 축구라는 놀이는 우리의 일상과 제도, 문화 전반의 화두다.
월드컵은 놀이공간과 생활공간, 노는 것과 일하는 것, 노는 것과 배우는 것, 노는 것과 돈 버는 것의 구분이 모호해져 버린 이 시대의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例)다. 그러니 이제 대답은 자명하다. 과거 새마을운동 하듯 월드컵 특수에 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같이 참여하여 놀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그럴 수 있는 문화적 기반을 평소에 만들어 두는 것, 여유를 가지면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허리띠를 졸라매지 말고 탕진해야 한다. 낭비해야 한다.
여가 시간을 희생해가며 먼지 낀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기 이전에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인생을 즐길 수 있을까 궁리해야 한다. 나의 즐거움은 돈으로 따질 수 없이 소중하다. 그래서 그것을 돈으로 환산할 때 엄청난 부가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노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돈, 한국의 문화산업은 이제 여유를 가져야 한다.
(최혜실/KAIST(한국과학기술원) 교수·국문학)
출처 - 조선일보 2002. 6. 8 문화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