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우위의 문화정책으로 미래를 준비하자

몇 년 전 새 천년이 다가오면서 문화의 중요성이 조직적으로 강조되었던 적이 있었다. 다가오는 21세기가 문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 과거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주장처럼 도시 곳곳에 표어로 나붙곤 했다. 물론 그런 주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의 중요성을 알리는 주장은 곧 문화를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하도록 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정책적으로는 문화산업 육성을 위한 각종 제도적 장치 마련 및 지원으로 나타남으로서 결국 문화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강조에 다름 아니게 되어버렸다.

사실 1998년에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문화분야에서 예산 1%를 확보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문화관광부의 예산이며 여기에는 체육, 관광, 미디어 등에 관한 예산이 포함되어있음) 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가 적지 않았으며 문화정책에 대한 관심도 어느 정부보다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현 정부가 문화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소홀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은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 정부는 IMF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출범하면서 잘 알려진 것처럼 신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정책을 택하였으며 이것은 시장논리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났다. 문화정책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각종 문화시설 및 기관의 운영에 책임경영 개념을 도입했으며 마침 새롭게 도입된 지식기반사회 개념에 걸맞는 문화정책을 문화산업에 대한 강조로 부응하였다. 이러한 정책적 대응은 그러나 결국 문화의 경제적 효과와 문화의 부가가치 생산에 집중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한 정책적 관심의 편중은 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후 예술창작인 중심으로 문화예술분야에 대한 지원을 적지 않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에 대한 홀대로 인식된 것은 물론 특별히 두드러진 문화정책적 효과를 가져오지도 못하였다.

문화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강조 혹은 경제적 접근의 문화정책은 사실 우리나라에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 근대적 문화정책의 역사를 갖고 있는 서구의 경우를 비롯하여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 우는 국가들에 있어서 이미 정책의 한 방향으로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들은 시설, 인력, 프로그램의 측면에서 오랜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이미 충분한 여건을 확보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러한 오랜 기간동안 준비되고 유지되어온 문화적 여건을 오늘날 국가가 계속 감당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경제적 효과라는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이제 여건과 기반을 마련해 나가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경제적 어려움과 인식부족으로 문화의 경제적 효과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문화정책은 이제 냉철히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에 미래가 있다는 그 명제 자체는 올바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의 몇 가지를 미래를 위한 문화정책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국민에 감동을 주는 문화정책이 필요하다. 지금 같이 문화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기 때문에 문화정책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사실 엄밀히 말해서 문화적인 주장이 아니다. 공업화로서 근대화를 시작한 이래 우리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경제의 중요성을 문화를 빌어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몇 년간의 문화정책은 경제우위의 문화정책적 성격이 짙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우위의 문화정책은 사실 호기심이상의 감동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목말라하는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문화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문화 그 자체가 우리의 삶에 신선함과 생동감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정책이 요구된다. 이러한 정책은 결국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새로운 성찰에서부터 가능할 것이다.

둘째, 그렇다고 해서 문화 그 자체를 위한 정책을 지향할 필요는 없다. 특히 전통적으로 인식되어 오던 소위 고급예술 중심의 정책으로 국한시킬 필요는 더 더욱 없다. 물론 예술인들의 창작여건을 더욱 개선하고 지원하는 일은 마땅히 개선되어야 하겠지만 오늘날 특히 요구되는 것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균적인 문화적 삶을 향상시키는 문화정책이 필요하다. 이러한 정책은 오늘날 강조되는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세째, 문화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문화에 있어서 불평등은 개인, 단체, 지역 등에 모두 적용되고 시설, 인력, 프로그램 등과 같은 동원자원에도 언급될 수 있는 폭넓은 개념인 만큼 여기서 모두를 거론할 수는 없 수 없으며 또 단시간 내에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을 문화정책의 철학이자 원칙으로 견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원칙 하에 우선적으로 문화적 접근에 있어 소외되어 있는 개개인과 지역에 대하여 어떻게 배려할 것인지가 최우선적인 정책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물론 현재도 이런 부분에 대하여 전혀 정책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즉 시설배치나 프로그램 제공 등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지역 간, 계층 간, 세대 간 문화적 불평등은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문화적 불평등의 문제는 단순히 정책프로그램 몇 개로 해결하려할 것이 아니라 문화정책의 지향원칙으로 수용하여야 한다. 국가의 미래가 문화에 달려있다는 주장을 타당한 것으로 수용한다면 개인과 지역의 미래를 위해서도 문화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또 이들의 문화적 불평등은 결국 미래의 기회와 삶에 대한 불평등으로 이어지게 되는 만큼 이에 대한 정책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넷째, 이런 점에서 국민들의 평균적인 문화수용능력을 제고하고 관심을 갖도록 만드는 것은 물론 나아가 자신을 문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 국민들에 있어 문화를 향유하는 훈련은 가장 일반적이며 동시에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학교와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문화의 시대 운운하지만 이런 점에서 개개인의 문화적 수용과 표현 능력 제고의 기회는 거의 사각지대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너무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한 사회의 개개인이 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더 이상의 문화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문화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각종 기회의 제공이다. 가능하면 학교안과 밖의 유기적인 연결을 통해, 그리고 각종 사회문화시설에서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개개인은 문화적 감성을 가꿀 수 있을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문화예술을 의미 있게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형성된 한 사회의 창의력과 상상력은 비로소 문화산업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경제적 부가가치 산출을 위한 바탕이 될 것이다.

다섯째,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주체를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중앙정부 중심의 정책으로부터 비영리 단체는 물론 시민문화단체의 참여에 의해 이루어지는 문화정책이 요구된다. 여기에 기업의 조건 없는 지원도 필요할 것이며 지역사회의 참여 또한 중요할 것이다. 정책주체의 다양화는 결국 정책을 둘러 싼 의사결정의 민주화는 물론 이를 통한 진정한 욕구의 표현과 충족도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다. 특히 시민사회가 문화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문화와 관련하여 시민사회의 역량이 성숙되지 않은 만큼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특히 지역에서 문화활동을 하는 시민단체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은 지역사회의 강화는 물론 문화적 다양성을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다.

정갑영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선임연구원)
출처 - 비전@한국 정책대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