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 안정 흔드는 사법부 과거청산
	2005-10-04
법적 안정 흔드는 사법부 과거청산 법은 항상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수단이다. 그래서 법은 보호받지 못하는 소수의 권익에 눈감는다고 비판받으며, 미래를 대비하는 것은 물론 변화하는 현실조차도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을 받는다. 어떻게 보면 그런 비판은 법이 가지고 있는 ‘원죄’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은 윤리의 최소한이다’라고 하듯이 법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가치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확고한 것만을 담고 있다. 즉, 법은 기본적으로 사회의 기초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반대로 법이 지키고 있는 기본은 항상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 보호돼야 하는데, 이를 ‘법적 안정성’이라 하고, ‘판결의 확정력’이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민사·형사법에서 인정되는 ‘판결의 확정력’은 진리와는 다를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재판부의 판결을 받은 경우 그 현실을 인정하고 이를 보장해 주는 역할을 한다.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 이러한 제도를 무리하게 인위적으로 변경하게 된다면 의도와는 달리 법은 힘을 잃게 되고 결국 전체 사회의 기본마저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후 최근까지 잘못된 과거사 청산에 대해 민·형사상의 시효까지 배제해서라도 이를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신임 이용훈 대법원장도 취임사에서 “사법부는 독립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인권보장의 최후 보루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다”고 언급하고 “무엇보다 지난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는 용기와 뼈를 깎는 자성의 노력, 새로운 길을 여는 지혜의 결집이 요구된다”며 과거사 문제를 짚고 넘어갈 것임을 시사했다. 또한, 열린우리당 이은영 제1정조위원장은 재심특별법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전국 법원이 긴급조치법·국가보안법·집시법에 관련됐거나, 판결문에 ‘독재’ 또는 ‘민주’라는 단어가 들어간 1972∼89년 사이 사건의 판결문을 수집하는 움직임 역시 이런 흐름과 연결된다. 이러한 과거사에 대한 인식과 반성은 전체 역사에 있어 필요한 과정이며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일 것이다. 현재 집권하고 있는 여당 등에서 이러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을 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 그러나 과거사에 대한 인식과 반성은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의 해당 기능을 통해 사회가 허용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추진돼야 한다. 대한민국의 법은 잘못된 과거사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게 아니다. 청산돼야 할 과거사의 당사자는 물론 대한민국 국민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다. 과거사 청산을 말하는 것은 그만큼 현재 사회의 기초가 안정됐음을 의미할 수 있다. 또, 현재의 안정 위에서 과거 청산이 이뤄질 때에만 그 순기능이 작용하게 되고, 과거의 청산이 오히려 현재의 기초를 흔든다면 이를 추진할 의미는 사라진다. 최근 과거사 청산과 관련, 언급되는 ‘진보당 조봉암’ 사건이나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을 비추어 보면 과거 암울했던 독재정권 시절 정치권력의 부당한 간섭에 휘둘려 사법정의를 흔들었던 점을 전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거의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당시 재판부에 대해 일정한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실효성과 관련해 의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타 유사 사건에 대한 재심사유 확대 움직임이 발생한다면 순기능보다는 사회 전체에 미치는 역기능이 더 많을 것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재심을 해야 한다면 ‘재판의 확정력’이 시대의 정의감에 비춰 용납될 수 없을 정도로 허위임이 인정되는 경우에 법적 안정성과 법적 평온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재심 사유의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 해결하고, 특단의 조치를 통해 행정적으로 과거의 고통을 보상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사회 전체를 구성하는 법의 역할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다른 부분에서 유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수단을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정진연 (숭실대 교수·법학) 출처 - 문화일보 2005. 10. 4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