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 무시한 낙선인사 구제론
	2004-04-21
유권자 무시한 낙선인사 구제론 총선에 승리한 열린우리당 일각에서 벌써부터 정치적 사고의 수준을 엿보게 하는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수도권과 영남권에서 낙선한 현역 의원 및 장·차관 출신들을 낙선자 배려 차원에서 다음 개각 때 입각시킨다는 것이다. 여권 고위 관계자의 입에서 나왔다 하고, 구체적인 자리에 특정 인사의 이름까지 거명되고 있으니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은 아닌 것 같다. 다행히 청와대측은 “지금 할 얘기가 아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후보자의 당락이 갈린 지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터에 낙선 인사 중용설이 나오는 것은, 아무리 여권이 압승했다 해도 유권자의 민의를 무시하는 오만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정치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낙선자를 곧바로 장관이나 대통령 보좌관 등 고위직에 기용한다면, 다른 후보를 당선시킨 유권자들의 의사, 이른바 총선 민의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인가. 지역주의 망령 때문에 낙선한 것으로 보는 것일 테니, 그들은 유권자의 선택을 비웃고 있거나, 아니면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앞으로는 상생과 화합의 정치를 펼치겠다고 천명한 것과는 방향이 전혀 다르지 않은가. 더욱이 국회의원 국민소환제의 도입 추진을 선거공약으로 내어놓았던 열린우리당이 낙선자 배려 차원 중용을 운위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앞뒤가 안 맞는 일이다. 국민소환제 도입의 근본 취지는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계속 추적 감시하며 줄곧 국민의 심판대에 올려 놓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법이 제정된다면 감시와 소환의 대상은 모든 국회의원에게 공히 적용되는 것이며,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도 거기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의원이 소환 대상에 포함되는 만큼, 자신들은 건강한 의정활동을 펼치겠다는 각오를 담고 공약으로 내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낙선인사 중용설을 듣게 되면서 저절로 이는 의구심은, 그들은 혹여 자신들이 부패정치 세력으로 낙인 찍었던 야당 의원들만을 국민소환의 표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정치인이 선거에서 낙선했다는 것은 일단 공직 담당자로서 적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최소한 해당 선거구의 국민들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낙선 인사가 입각해서 장관으로 일해야 할 만큼 출중하고 능력 있는 인물이라면, 장관직에 그대로 남겨 두었어야 한다. 패배할 수 있는 선거판에 내보내 결격 딱지를 받게 하지 말았어야 한다. 아무리 장관직을 비롯한 고위 공직들이 대통령과 여권의 판단에 따라 임명·충원될 수 있는 자리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특정 정파의 전리품처럼 취급되어서는 안 될 존엄하고 권위가 서린 공적인 자리이다. 자기 당파의 결속을 꾀하고 영향력을 확대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자기 당파에 충성스러운 인물들을 공직에 임명했던 ‘엽관제도(spoils system)’는 200여년 전 미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러나 엽관제도가 극에 달했던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또는 그 후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낙선한 인물을, 그것도 선거 후 곧바로 고위직에 임명했던 예는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과 같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조차도 선거에서 낙선한 인물을 고위직에 바로 발탁한 사례가 없었다. 하마평이 나돌던 인물도 낙선경력이 있을 경우 당해 국회 임기 동안 배제했었다. 일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낙선자 재등용을 위해서는 적어도 국회의원 임기의 절반, 즉 2년 정도가 경과한 후에나 고려해 볼 정도로 총선에서 나타난 국민의사를 존중하는 자세를 보여야 하는 것이 책임 있는 여권의 태도가 아닐까. 백승현 (경희대 정치학 교수) 출처 - 세계일보 2004. 4. 21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