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검정국은 `새 정치` 가늠자
2003-03-18
특검정국은 `새 정치` 가늠자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가 통과시킨 대북 송금 관련 특검에 대한 법을 수용하기로 결정하면서 우려됐던 여야 간 정치적 격돌과 파행은 피할 수 있게 됐다. 이번 노 대통령의 특검 수용 결정이 여론의 지지를 받은 것은 대북 특검에 대한 처리가, 여야 간 쟁점 사안이 생겨날 때마다 정국의 주도권을 둘러싼 여야 간의 극한 대결로 치닫곤 했던 과거의 정국 운영 방식과는 달리 ‘상식적인’ 수준에서 원만하게 해결됐기 때문일 것이다. 극단적 대립으로 이어졌던 과거의 정치 관행 속에는 제로섬 게임적인 인식과 그로 인한 여야 간의 상호 불신이 깔려 있었다. 즉, 어느 한쪽이 이득을 보는 만큼 다른 한쪽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만큼 여야간 합의의 도출 가능성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쟁점 사안의 처리가 국민을 위한 공공재로 생산되지 못하고 정략적 차원의 노획물처럼 다뤄지기 일쑤였다. 이런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노 대통령이, 민주당 내의 적지 않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이 주도한 특검법을 우선 수용하고 이후 법안 수정과 관련하여 상대 정당에 대한 신뢰를 표명한 일은 이를 계기로 새롭고 건전한 여야 관계가 정립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 것이 사실이다. 특검법 수용 결정으로 한 고비는 넘겼지만 그렇다고 해도 앞으로 펼쳐지게 될 특검 정국의 미래를 너무 낙관적으로만 바라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노무현정부 출범 이전에 있었던 대북 송금이라는 ‘과거 사안’에 대한 조사가 이처럼 여야간 현저한 시각의 차이를 보이는 민감한 정치적 이슈로 떠오른 것은 그만큼 이 사안이 현재, 미래의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국회의원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내년 총선을 향하고 있고 각 정당의 정국 운영 전략 역시 이와 무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특검 법안이 어떤 식으로 수정돼 통과되더라도 특검 수사의 핵은 결국 김대중 전 대통령과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 이제까지 한나라당은 몇 차례 선거에서 반(反) DJ 정서를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영남의 표를 단단히 묶어내는 재미를 봐 왔다. 특히 2000년 총선에서 불었던 영남의 반 DJ 정서는 민주당과 민국당의 도전을 물리치고 한나라당을 이 지역의 유일한 대안으로 부각시켰다. 따라서 대북 송금 관련 의혹에 대한 특검 수사를 통해 정치적으로 죽은 DJ를 다시 살려내고 노무현과 김대중의 상호 연관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특히 영남 출신 한나라당 의원들의 입장에서는 유리하다는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에도 특검 정국의 향방은 총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은퇴했다고 하지만 적어도 내년 총선에서 호남 지역 출신 의원들은 DJ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만일 특검 수사가 DJ를 어렵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지역구가 호남이거나 전통적으로 DJ 지지세가 강한 지역구의 출신 의원들은 내년의 총선을 의식해 특검 수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대북 송금 특검은 과거 정부의 정책 행위를 수사하는 것이지만 그 파장은 내년 총선이라고 하는 미래의 결과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대북 수사 특검에 대한 정치권의 관심이 정책 결정과 집행에 대한 투명성, 대북 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중요성과 같은 공공재의 생산과 무관하게 된다면, 결국 남게 되는 것은 각 정당의 추악한 지역주의 선거 전략뿐이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특검 수사 이후 펼쳐질 앞으로의 정국은 야당인 한나라당의 정치력을 시험하는 기회도 될 것 같다. 한나라당이 여당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강경 일변도로 주장해 온 대북 특검이 수용됨으로써 이제 대북 특검의 향후 전개 방향과 결과에 대해 한나라당 역시 상당한 정치적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됐다. 더욱이 이번 일로 새 정치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향후 특검 정국이 과거와 같은 극한적 정당 대결로 이어지게 되면 민주당뿐만 아니라 한나라당 역시 거센 비판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특검 수사가 과거의 잘못된 정책 집행을 바로잡는 계기가 될는지, 아니면 선거를 앞두고 정략적 노획물을 둘러싼 다툼으로 전락하게 될 것인지, 새 정치에 대한 두 정당의 의지를 시험하는 중요한 무대가 될 것이다. 강원택 (숭실대 정치학 교수) 출처 - 문화일보 2003. 3. 18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