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권 남용 견제장치를
2003-01-04
사면권 남용 견제장치를 역대 대통령의 인품과 업적이 어떠했는지를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재임중 누구를 어떻게 사면했는지를 살펴보아도 좋을 것 같다. 지난달 30일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는 너무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면권은 대통령에게 주어진 매우 특별한 권한이니만큼, 가장 고귀하고 권위있게 행사되어야 한다. 대통령이 행사하는 사면권에 대하여 누구든지 수긍할 수 있고 뜻밖의 감동을 느끼고 국민 화합과 발전을 위하여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각계에서 모두 분노하고 있는 이번 사면조치는 어떠했는가. 사형수 4명에 대한 특별감형은 사형제도 폐지 논의와 관련하여 일정한 의의를 발견할 수 있고, 공안사범 가운데 일부에 대한 사면은 국민화합적 차원에서 이해가 되며,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사면도 국제화 시대에서의 외국인의 인권 보호 측면에서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제인과 고위 공직자에 대한 특별사면에 대해서는 의혹을 표시할 수밖에 없으며 선거사범에 대한 사면도 납득하기 어렵다. 특히 재판이 진행중인 사건에 관하여 형의 확정이라는 형식적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상소를 취하하는 방식을 취한 것은 권력과 피고인들 사이의 유착 관계를 추정하게 하는 작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면권은 삼권분립제도의 큰 예외이므로 그 발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했어야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건국 이후 지금까지 84회나 사면, 복권이 행해졌다고 한다. 사실 이 사회에서 재벌기업인, 고위공직자 등이 어떠한 이면적 과정을 거쳐 사면을 받게 되는지 실증적으로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의 이와 같은 사면 현상을 이국운 교수는 ‘사면의 과잉’ ‘사회지도층의 처벌과 사면을 두고 벌어지는 주기적인 밀실 거래’이고 ‘공범 의식의 왜곡된 표현’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의 사면 내용을 살펴보면 사면돼서는 안 될 인사 또는 사건이 으레 끼워팔기 식으로 포함돼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와 같은 불순한 내용이 있어야만이 사면권 행사의 묘미가 살아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 같다. 이번 사면도 사형수나 공안사범, 외국인 노동자들을 사면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경제인과 고위 공직자들을 사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들을 활용한 기색이 역력하다. 사형수 등을 사면한 의의에 대해서는 생명에 대한 외경심과 안도감이 어디에서도 선양되고 있지 않아 아쉽기조차 하다. 이번 사면에 대해 사법부에서 크게 분노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검찰에서도 불만이 크리라 생각된다. 일반사면은 국회의 동의를 받는 입법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처리할 수 없다. 그러나 특별사면은 법무부장관의 상신으로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이 명하도록 돼 있다. 따라서 이번 사면과 관련해서는 주무 부서인 법무부가 일정한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설혹 대통령 및 정치권에서 허울 좋은 명분을 앞세워 실제로는 정치적인 이해 관계에 따라 사면권 행사를 요청하는 경우라면 정부 안에서 자율적으로 억제되었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 스스로 사면권 행사를 절제하는 가운데 그 진정한 의미를 발휘하지 못하고, 계속 정치적 남용의 수준에서 사법권과 입법권의 본질적 권한을 침해하며, 국민의 심기를 오히려 불편하게 한다면 방지책이 있어야 한다. 즉, 사면의 구체적 요건을 강화하고 사면심사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사면권의 행사를 실정법적으로 제한하는 방법이 강구돼야 할 것이다. 사면권이 그와 같은 실정법적 제약을 받지 않더라도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그와 같은 희망이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 사면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아직도 재판이 진행중인 사건에 관하여 사면이 시행된 부분이다. 비록 이들에 대한 개인적인 형사범죄는 사면이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공적자금 비리 여부에 관한 국정조사에서 다시 문제삼고, 그때 사면 과정에 대해서도 그 전말을 추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대통령이 사면권을 권위없이 부적절하게 사용하면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종결되지 않고, 그때부터 다시 새로운 문제가 야기되고 말 것이다. 박연철 (변호사) 출처 - 문화일보 2003. 1. 3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