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에 얽매인 ‘토론’
	2002-12-05
형식에 얽매인 ‘토론’ 지역주의와 국정 혼선에 진저리가 난 많은 국민들은 21세기 첫 대통령 선거에서만은 ‘남부끄럽지 않은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다짐을 굳게 하고 있다. 이러한 다짐만큼 국민들은 후보자 이상의 열기를 가지고 3일 대선후보 첫 합동토론회를 지켜보았다. 본격적인 미디어 선거 시대의 새로운 장을 여는 이번 합동토론회가 일단 국정에 임하는 후보자들의 총론적 시각과 토론 태도를 비교하는 데에는 유익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토론의 외형적 긴박감에도 불구하고 후보자들의 진정한 국가 비전과 책임있는 정책 포지션을 알고 싶어하는 국민적 기대감에는 미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겨주고 있다. 한미행정협정(SOFA) 개정, 부패방지 대책, 검찰권 중립 등 국민들이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세 후보가 대동소이한 입장을 피력하였고,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뚜렷한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었음은 토론회의 주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국민적 관심사인 ‘정치개혁’과 ‘대외정책’부문에 있어서는 후보자들의 입장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낡은 정치를 청산하기 위한 ‘정치개혁’을 외치고 있지만, 상대방 떠넘기기식의 책임 공방에 치중할 뿐 정당 민주화, 국회 제자리 찾기, 정경유착 단절등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정치개혁의 기본틀을 확고하게 제시하지 못했다.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가 ‘지역감정극복’과 ‘3김 청산’을 둘러싸고 벌인 공방은 두 후보가 3김과의 연계와 지역구도하에 입각한 득표기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에 비추어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어려웠다. 차라리 과거지향적인 소모적 공방보다는 겸허한 자세로 낙후한 정치문화를 개선하고 정치권의 경쟁력을 창출할 수 있는 구체적 핵심방안을 국민에게 솔직히 토로하는 것이 그나마 호소력 있는 태도였다고 본다. 공개적인 토론과 타협을 통하여 국정난제는 물론이고 여야의 대립된 시각을 조정하는 것이 정치권의 기본 임무임에도 우리 정치권은 특히 선거를 앞두고 일만 터지면 그 해결책을 검찰 등 사법권 쪽으로 돌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번 토론회에서도 후보자들이 정치의 사법화(司法化)를 막는 타협과 협력의 기본 철학을 강조하는 대목은 눈에 띄지 않고 있다. 주변 4대 강국 틈새에서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추구할 대외정책의 목표와 전략의 선택은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책무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남북문제와 부분적인 한·미관계에 국한할 뿐 대외정책의 기본틀과 정책수단의 활용방안이 중시되지 않은 점은 추후 보완되어야 할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번 토론회에서 흥미로운 것은 선거 여론조사에 기초한 양자 대결구도가 3자 토론의 진행방식을 통하여 다소 희석된 모습으로 비추어졌다는 점이다. 이·노 후보 간의 첨예한 상호 공방 속에서 권영길 후보의 질책성 결론 제시는 여론조사상의 지지율 분포를 무색케 하는 모습이었다. 1분30초를 단위로 질의·답변·반론·재반론 방식으로 진행된 이번 토론회가 시청자들의 이목을 잡아두는 데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지 몰라도, 국정의 핵심사안에 대한 후보자들의 진솔한 입장을 파악하는 데는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남은 2·3차 합동토론회에서는 후보자들의 국정비전을 폭넓게 청취할 수 있도록 답변 시간의 기계적 배분과 획일적 반론·재반론식 진행은 부분적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2주일이 지나면 후보자 중 한 명이 16대 대통령으로 탄생됨은 불변이다. 그러나 ‘훌륭하지는 않더라도 제대로 된 대통령’은 20년에 한 번 나올지도 확실하지 않다. ‘제대로될 대통령’에 대한 불확실성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권자들이 정치적 무관심, 구태의연한 지역정서와 ‘누구는 안된다’는 막연한 배타주의에서 과감히 벗어나는 것이다. 吳然天 (서울대 행정대학원 원장) 출처 - 조선일보 2002. 12. 5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