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진실 가려야
	2002-12-03
'도청' 진실 가려야 불법도청이 자행되고 있다는 한나라당의 연이은 폭로와 이를 부인하는 국정원 간의 공방을 보면서 신문에 실렸던 광고가 생각났다. 4년 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8년 11월 4일자 도하 각 일간지 1면에 5단을 차지했던 광고였다. 정부의 힘센 5개 부처 장관들이 불법도청을 엄단하겠다고 만천하 국민들에게 친절하고 평이한 문장으로 명확하게 장담하는 광고를 내면서 굳은 결의를 표명한 것이다. 이 광고에는 내가 어줍잖은 지식으로 이 칼럼을 쓰려고 머리를 쥐어짤 필요조차 없는 모범답안이 5개 부처 장관님들이 게재한 광고에 명쾌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안심하고 통화하세요, 국민 여러분의 사생활 보호는 '국민의 정부'가 추구하는 으뜸 과제입니다"라는 주제다.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웃는 얼굴로 "우리끼리 전화는 우리끼리만 들어요"라고 말하는 부드러운 이미지 사진이 눈길을 끈다. 법무부와 국방부, 행정자치부, 정보통신부, 국가안전기획부 5개 부처가 공동으로 만든 이 광고는 "국민 여러분의 통신비밀을 보호해 드리는 것도, 반사회적 반인륜적 범죄로부터 지켜 드리는 것도 저희의 의무입니다"라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국민의 인권보호가 저희의 최우선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 불법도청 방지, 감청제도의 개선에 최선을 다할 것을 분명히 약속드립니다." 마약거래와 어린이 유괴, 인질강도, 항공기 납치 등의 범죄퇴치와 국가안보를 위해 극히 제한된 경우에 한해서만, 그것도 엄격한 절차에 따라 감청(監聽)을 허용한다는 것과, 감청된 내용은 절대 공개되거나 사사로운 목적으로 이용될 수 없다는 사실도 광고는 가르쳐 주고 있다. 광고가 실리던 날의 신문에 따르면 이 해괴한 광고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주재로 열린 청와대 국무회의의 논의를 거쳐 발표한 것이다. 광고의 문안은 안기부가, 대국민 성명은 법무부가 중심이 되어 작성했고, 국무회의 의결을 거쳤을 뿐 아니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성명 발표를 청와대가 맡았다는 보도가 광고의 무게와 권위를 더해 준다. '광고주'였던 당시의 장관들은 물러났으니 정부의 약속은 없었던 것으로 되고 말았나. 그럴 수는 없다. 장관은 바뀌어도 정부의 약속은 엄연히 살아 있다. 도청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불법이며 인권을 짓밟는 비열한 행위다. 내 전화도 어디선가 엿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농담으로 한 말이라도 혹시나 문제가 되는 일은 없을까. 정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 같은 서생(書生)의 사적(私的)인 전화마저 도청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만드는 것이 도청이다. 발가벗겨진 몸통을 드러내는 것 같은 불쾌감과 두려움을 느낀다. 국정원은 도청자료의 출처를 대라고 반박하고, 민주당의 김원기(金元基) 이강래(李康來) 두 의원은 의혹을 제기한 한나라당 김영일(金榮馹) 사무총장을 고소하는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다. 어떤 결말이 날지는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신문에 실린 구체적인 통화내용을 보면서 근거없는 주장이라거나 조작이라고 생각할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기자와 취재원의 통화 도청은 언론 자유에 대한 중차대한 위협이다. 도청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언론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광고주가 언론사에 압력을 가하는 통화가 있었다면 권력이 언론에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작용하고 있거나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권과 도덕성을 간판으로 내세운 정권이 도청과 언론탄압, 불법적인 계좌추적 등을 자행하고 있다면 국가의 신뢰도도 추락한다. 사직당국은 철저한 진상규명으로 국민들의 불안과 불신을 해소하기 바란다. 鄭晉錫 (한국외국어대 언론학 교수) 출처 - 세계일보 2002. 12. 3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