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에 휘둘리는 정치
2002-11-21
여론조사에 휘둘리는 정치 이번 대선 과정에서 나타난 흥미로운 현상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 여론조사의 빈도와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주요 신문과 방송이 수시로 여론조사를 실시해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율 변화를 보도하고, 정치권의 행보도 여론조사의 결과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아 왔다. 현재도 정몽준 후보와 노무현 후보가 후보단일화를 여론조사에 의해 이루기로 합의하고 협상이 진행 중인 것을 고려하면 올해 대선 정국은 여론조사가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듯 싶다. 선거여론조사가 금지됐던 과거 권위주의 시절을 떠올리면 언론이 앞다퉈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보도하는 현실은 그만큼 민주화가 진전된 증거로 볼 수 있다. 정확한 여론조사와 보도는 국민들에게 선거정보를 알려서 올바른 정치적 선택에 기여하고, 나아가 국민들의 선거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키는 긍정적 효과를 가져온다. 또한 정치권이 여론조사를 통해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에 신속하게 대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도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여론조사 결과를 맹신하거나 여론조사 결과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태도다. 여론조사는 유권자들의 정치적 선호를 파악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동시에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방법이다. 변덕스런 민심 감안했나 여론(public opinion)은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의사소통의 과정에서 형성되고 변하는 속성을 가진다. 나아가 이러한 여론을 측정하기 위한 여론조사도 대중이 가지고 있는 선호의 단상만을 보여주는 불완전한 도구일 수밖에 없다. 표본 추출, 조사 시점, 설문 문항의 작은 차이가 상이한 조사결과를 가져오곤 한다. 가끔 방송사의 선거예측보도가 틀리거나 같은 시점의 여론조사가 조사기관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 여론조사의 한계를 잘 나타낸다. 따라서 여론조사 결과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피하고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여론조사의 중요성이 지나치게 커진 선거정치에서 우려되는 부작용은 여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여론의 동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여론조사를 수행하는 기관이 의도적으로 왜곡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이를 통해 여론의 동향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를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선거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여론조사의 정치적 이용에 대한 유혹은 커지게 마련이다. 여론조사가 지배하는 정치가 미치는 또 다른 폐해는 정책과 이념을 통한 정당정치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가 여론조사 결과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되면, 이념과 정책을 통해 경쟁하는 정당정치는 실종되고, 지지율의 추세에 따라 공약(空約)을 남발하거나 세 불리기를 시도하는 지지율 지상주의가 나타나기 쉽다.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가 전격적으로 합의했던 단일화 논의가 여론조사의 방법에 관한 이견으로 다시 난항을 겪고 있는 듯하다. 단일화의 절박성과 현실적으로 다른 대안이 없을 것이라는 사정을 감안해도 두 후보의 정치생명과 대선 구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결정을 여론조사에 맡기는 것은 여론조사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양 캠프가 합의에 성공하더라도 여론조사의 결과가 오차범위 내로 근접하게 나오게 되면 실제로 제비뽑기와 큰 차이가 없게 된다. 여론조사에 의해 한 후보가 탈락했을 때 탈락한 후보의 지지자들이 결과에 승복하고 선택된 단일후보에게 표를 던질지도 의문이다. 정당정치 되레 약화시켜 여야 모두 여론조사에 나타난 지지율을 올리기 위한 마지막 세 불리기 경쟁에 나선 형국이다. 대선 국면에서 정치권이 여론조사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변덕스러운 여론과 이러한 여론을 측정하는 불완전한 도구인 여론조사에 정치권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휘둘리는 모습은 새로운 정치를 갈망하는 국민들이 기대하는 바람직한 선거정치의 모습은 아니다. 현실성 있는 정책과 공약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확대하기 위해 경쟁하는 선거정치를 만드는 노력이 기대되는 시점이다. 李來榮 (고려대 정치학 교수) 출처 - 중앙일보 2002. 11. 21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