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심의, 선거에 휘둘리지 않게
	2002-10-23
예산심의, 선거에 휘둘리지 않게 이번 주부터 국회에서는 예산심의가 시작되었다. 정부가 제출한 117조7000억원 규모의 예산안을 심의하는 중대한 일이다. 예산안 심의는 매년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로, 또 여야 힘겨루기 때문에 부실심의의 논란을 불러일으켜 왔지만, 특히 금년은 대선 정국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는 상태라서 졸속예산심의가 우려된다. 예산안 심의는 물론 법정기일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법정기일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질적으로 성실한 심의가 이루어지는 데 있다. 하지만 바람직한 질적 예산심의에 대하여 왜 비관적이며 자조적이 되는가. 우선 하나는 정부예산안 심의가 공공재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공공재란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우리의 재화'다. '우리의 재화'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재화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공공재의 아킬레스건을 확인하게 될 공산이 크다. 집안에 있는 샤워실은 깨끗한데 공중화장실이 그다지 깨끗하지 못한 이유, 또 집안에 있는 책상은 깨끗한데, 공공 도서관이나 학교에 있는 책상에는 여러 가지 낙서가 지저분하게 쓰여져 있는 현상이야말로 공공재 문제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이처럼 공공재가 사유재보다 부실한 이유는 그 특유의 '혜택의 비배제성'에서 발견된다. 내가 아무리 부실하게 사용해도 그것이 생산되기만 하면 내가 사용하는데 별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부실한 공공건물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저 건물이 제 것이었다면 저렇게 형편없이 지었을까." 예산심의는 국회가 하는 것이 아니라 국회의원들이 하는 것이다. 문제는 국민의 대표라고 하여 이러한 공공재 멘탈리티에서 쉽게 탈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과연 국회의원들이 자기 집 살림살이처럼 정부예산을 꼼꼼하게 심의할 수 있을까. 금년 예산안 심의의 부실화를 우려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뜨거워진 대선 정국 때문이다. 대통령 후보들 가운데 누구를 지지하느냐, 누가 대세를 잡느냐 하는 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국회의원들의 마음이 콩밭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 대선을 불과 두 달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국회의원들의 대선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즉 대선에 대한 관심도 이해할 만하고 또 예산안 심의도 중차대한 사안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을까. 여기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한 어느 큰스님의 이야기가 생각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국회의원들이 예산안 심의를 하면서 이 화두를 음미했으면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고 한 스피노자의 경구를 상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대선이 임박해 있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국회와 정당이 예산안 심의에 엄정하게 임해야 할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대선에서 승리한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하늘이 두쪽 나는 한이 있어도 왜 대선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결국 국정을 책임 있게 수행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대선을 위한 대선승리'란 '권력을 위한 권력 추구'처럼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것이다. 그렇다면 책임있는 예산안 심의야말로 국정을 책임있게 수행하는 것에 대한 핵심적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예산안 심의를 부실하게 하고 또 선심용 예산심의를 하면서 책임있는 국정수행능력을 말한다면 이는 모순어법이다. 이점이야말로 대선에 임하고 있는 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이 명심해야 할 사안이 아닐 수 없다. 朴孝鍾 (서울대 정치학 교수) 출처 - 세계일보 2002. 10. 23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