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외면한 납북자
2002-09-23
정부가 외면한 납북자 미국에서 출간된 한국전쟁에 관한 다수의 책 가운데는 반드시 장진호(Chosin Reservoir)전투가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심지어 장진호전투 자체에 관한 단행본만도 3권이나 된다. 함경남도 장진(長津)군에 위치한 장진호는 1950년 12월초 북진하던 미군 해병대 1사단이 중공군 10개 사단의 인해전술에 밀려 격전 끝에 혹한 속에서 1000여명의 미군이 사망한 장소다. 미군 전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고 있으며, 사실상 21세기 들어 최초로 미국과 중국이 직접 맞붙은 대형 전투이다. 장진호 사례를 언급하는 이유는 전투의 교훈을 얻기보다는 1000여명에 달하는 사망자 유해를 찾는 미군의 끈질긴 노력을 부각하기 위해서다. 미국은 북·미간 정치협상과 달리 유해발굴에 있어서는 북한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하면서까지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투입, 수십년째 장진호 ‘미군찾기’ 에 나서고 있다. 하와이 히컴 미군기지내 미국 육군 중앙신원확인소 정문에는 ‘결코 그대를 잊지 않으리(You are not forgotten)’ 라는 구호가 붙어 있다. 이 단순한 문구 하나가 전세계에 주둔한 수백만의 미군을 비롯, 미국내 새파란 젊은이들까지 기꺼이 조국을 위하여 헌신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난 96년 미국 공군 F16 전투기 조종사 오그래디 대위는 세르비아 내전 때 정찰임무를 수행하다가 미사일 공격을 받고 추락했다. 비상 탈출에 성공한 그는 고립 무원의 숲속에서 구출을 기다렸고, 항공모함까지 동원한 입체작전으로 그는 무사히 생환했다.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구출에 참여한 해병대와 그를 ‘미국의 영웅’이라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고, 언론은 연일 특집보도를 했다. 오그래디 대위는 살아 돌아온 감격을 “오, 미국, 신이여 이 나라를 축복하소서”라고 표현했다. 상업성이 최우선인 미국 할리우드 영화조차도 인질 구출, 영웅만들기 등의 주제를 가장 인기있는 소재의 하나로 설정하고 있다. 미국 국민의 자긍심을 자극하고 동참 의욕을 느끼는 국가 차원의 의전행사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사병 1명이 사망해도 알링턴 국립묘지의 안장식이 생중계된다. 이는 국가가 국민을 대상으로 전개하는 고도의 심리적인 대국민 마케팅이다. 미국 정부는 자신들이 국민에게 어떠한 자세를 취하는지에 따라 반대급부가 달라지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미국이 외국에서는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전쟁을 감행하는 근저에는 이러한 국민 감정을 통솔하는 심리적 안전장치가 있다. 이러한 사례는 미국만이 아니라 일본 등 선진국 등도 적절하게 활용하는 고도의 통치기법이다. 심지어 우리가 국가도 아니라고 폄훼하는 북한조차도 이러한 면에서는 남측보다 한 수 위다. 그간 북한은 남북협상에서 끈질기게 비전향 장기수의 송환을 요구하여 63명을 인도 받았다. 성대한 환영식을 끝내고 평양에 정착한 이들은 주기적으로 평양 언론에 출연, 김일성·김정일의 은덕과 북한체제의 고마움을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는 것이 남측의 눈에는 일종의 사기극으로 보일 수 있지만 체제안정과 주민통합에는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고 있다. 반면에 남측에서 반세기만에 북한을 탈출한 국군포로 등이 서울에 와서 받는 대접은 북측과는 대조적이다. 언론은 입국사실조차 간단한 단신으로 처리한다. 결국에는 국민의 애국심을 호소할 수 있는 대국민 마케팅의 호기를 간단하게 날려버리게 된다. 애국심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정부와 국민간에 부단한 심리적 교감의 결과다. 구호가 아니라 행동이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단초라는 것은 국가통치학의 서문에 나와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다. 다수의 우리 국민이 북·일 평양선언과 일본내 납북자 가족들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부러움과 자조 의식일 것이다. 한번의 협상으로 숙원을 해결하는 능력은 일본의 경제력에서 나온다고 볼 수도 있다. 100억달러에 달하는 ‘배상금’ 앞에 북한이 양보를 했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으나 국가의 자존심이 어찌 돈만 갖고 지켜지겠는가. 국민소득 1만달러가 넘었다고 무조건 선진국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선진국은 정부가 국민을 철저히 보호한다는 기본 임무를 철저히 인식할 때에만 가능하다. 향후 계속될 남북 협상에서 납북자 문제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정부의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다.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 교수) 출처 - 문화일보 2002. 9. 23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