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災로 난리인데 北에만
	2002-09-09
水災로 난리인데 北에만 태풍이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지나간 지도 열흘이 넘었다. 하룻밤 사이에 집도 논밭도 가게도 가재도구도 모두 잃고 한데 나앉은 백성이 수십만이라 한다. 도로·철도·전기·전화도 끊기고 둑도 산도 허물어져 내렸다. 공장·비닐하우스·축사도 물에 잠겨 폐허가 된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이쯤 되면 온 국민이 직·간접으로 피해를 본 전국적 재해다. 개인으로서는 어떻게 손써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수재의연금을 보태고 일손 돕는 일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때가 정부가 나서야 할 때다.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추가경정예산’을 세워 복구비를 마련하며 동원령이라도 내려 발벗고 앞장서서 구호와 복구에 나서야 할 때다. 그러나 정부는 사고 수습 정도의 대응밖에 하지 않고 있다. 한심하다. 현대 사회에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많다. 외침(外侵)으로부터 영토와 국민을 지키는 일, 국가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 나라의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일 등 벅찬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정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국민의 삶의 질을 보장하는 일이다. 국민의 식(食)·의(衣)·주(住)·교육·건강의 다섯 가지를 챙겨주는 일이 정부가 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 중에서 어느 것부터 해야 하는가 하는 우선 순위를 정하는 일이 통치다. 국민의 다양한 요구를 타협을 통해 하나로 모으고 우선 순위에 따라 처리해 나가는 일이 통치이다. 민주정치에서는 주권자인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통치자가 이런 일을 담당한다. 이번 재해를 다루는 정부의 처사를 보고 있노라면 분통이 터진다. 아니 걱정이 앞선다. 도무지 우선 순위를 정하는 기준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을 잃고 집과 논밭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는 국민들 앞에서 금강산 유람선을 띄워 보내고, 촛불 밑에서 생라면을 씹고 있는 국민들이 몇 만명이 있는데 한편에서는 축구경기를 벌이고, 국가의 동맥인 경부선 철도가 내려앉았는데 당장 아무도 다니지 않을 경의선 연결에 열을 올리고 있다. 금년 농사 다 망쳤다고 땅을 치는 국민들 앞에서 쌀과 비료를 북한에 실어 보내는 일을 서두르고 있다.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정부가 당장 해야 할 일을 열거한다. 첫째, ‘국가재난사태’를 선포하고 정부가 추진하는 불요불급 사업을 우선 접어두고 구호복구 사업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야당 후보의 도덕성 검증이나 여당의 당내 분규 수습에 힘을 쏟을 때가 아니다. 남북협상이나 벌이고 북한에 쌀을 보내는 사업에 매달릴 때는 더욱 아니다. 둘째, 중앙 정부에 ‘재해복구위원회’라도 설치해 모든 행정력을 재해복구에 집중하여 촌각을 다투는 구호사업부터 신속히 처리해 나가야 한다. 절차를 따지다가는 사람이 죽는다. 셋째, 국회의 협조를 얻어 재해복구특별법을 제정해 과감하게 복구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 국고가 모자라면 국채를 발행하든가 공적 자금이라도 조성해야 한다. 넷째, 차제에 자연재해에 취약한 모든 공공시설·도로·철도 등을 다시 점검하고 근본적인 보수에 착수해 두번 다시 이런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 70년 된 낡은 다리, 100년 된 강둑을 다시 놓고 다시 쌓아라. 다섯째, 급하지 않은 일들을 과감히 뒤로 미루어라. 반년도 남지 않은 잔여 임기에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현란한 ‘통일사업’들은 다음 정부가 시간을 갖고 생각해 가면서 해 나가도록 미루어 두어라. 길에 나앉아 있는 국민들에게 살 길을 마련해 주는 일이 급한데 한반도기를 들고 축제에 참여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제대로 구분할 줄 아는 정부라야 국민들이 신뢰한다. 석 달 후에 있을 국민들의 심판을 가다리고 있는 정부인 만큼 더더욱 할 일, 하지 말 일을 가려가면서 국정에 임해야 할 것이다. 이상우 (서강대 교수·정치학) 출처 - 조선일보 2002. 9. 9 아침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