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도 함께 떠내려 갔다
	2002-09-06
‘文化’도 함께 떠내려 갔다 을축년 대홍수와 사라호 태풍이 기억의 저편으로 넘어간 이제, 슬며시 다가와 사정 없이 할퀴고 지나간 태풍 ‘루사’는 우리 시대에 일찍이 겪은 바 없는 큰 아픔을 남겼다.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잃고 몸 하나만 남은 사람들, 며칠 전까지 사람이 살던 곳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폐허 천지가 된 마을의 모습, 텔레비전 화면이 비추는 참혹하고 처참한 광경에 절로 저려오는 가슴을 어쩌지 못할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끊긴 길과 통신망이 조금씩 열리며 인명과 재산의 피해 규모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재산도 재산이지만 수백명의 귀한 목숨이 희생되었다.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목숨이 그토록 허망하게 꺼졌는데 이보다도 더 큰 비극이 어디 있을까마는 ‘루사’는 사람들의 목숨과 재화 이외에도 많은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 버렸다. 근대국가를 뽐내는 곳에서 사람들의 교만과 오만에 대한 자연의 징벌이 이 정도까지 이른 사례도 그리 흔치 않지만, 너무나도 많은 곳에서 산과 들과 강은 황폐한 모습이 되었다. 제멋대로 산을 자르고 강을 막고 들을 넓혔기에 루사가 퍼부은 물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레 흐르는 물줄기를 다시 트려는 듯 전대미문의 산사태와 홍수를 일으키며 거세게 몸부림쳤다. 자연의 거센 몸부림은 산과 들과 강변에 있던 문화재도 함께 뭉개고 짓밟아 놓았다. 600년을 살았다는 천연기념물 팽나무도, 천지연폭포 옆의 난대림 숲도 반신불수가 되었고, 수백년 동안 의연히 제자리를 지키던 청송의 왕버들은 뿌리를 박은 터전과 함께 탁류 속에 휩쓸려 떠내려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단다.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슬픈 일이다. 산 목숨을 갖고 있는 천연기념물만이 이토록 처참한 경우를 당한 것이 아니다. 그 전모를 알려면 아직도 한참 시간이 흘러야겠지만 김해, 부산, 순천, 익산, 경주 등 전국 각지로부터 수많은 문화재 피해가 보고되었다. 특히 영동지방의 피해는 그곳에 내린 기록적인 폭우만큼이나 엄청나리라. 붕괴 직전의 위기에 처한 경포대의 모습이라던가 흙에 묻힌 신복사 부처님의 사진, 그리고 마치 ‘영화의 한 순간과도 같이’ 순식간에 해운정에 물이 차올랐음을 전해주는 신문기사의 내용은 그날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졌는가를 말해 준다. 이런 기사를 읽노라면 진전사터나 선림원터와 같이 동해안 깊숙한 산골짜기에 있는 옛 절터와 그 위에 남아 있는 국보급, 보물급 문화재들이 이번 비에 온전하게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그러나 신문에 보도된 훼손 사례는 지정문화재에 관한 것일 뿐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관리 대상이 아닌 갖가지 비지정 문화재는 또 얼마나 많이 훼손되고 소멸되었을까. 영동지방 곳곳에 산재한 비각이나 산신각과 같이 관청의 관심 밖에 있는 문화유산 중 이번 비에 부서지고 사라진 것들은 그대로 생명을 다한 셈일 테지만, 그 실태는 아마 두고두고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침수로 인한 피해의 실체가 앞으로 서서히 드러나며 우리는 또 한번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더욱 심각한 문제겠지만, 수많은 매장문화재가 자신의 존재를 말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소멸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연재해로 인한 문화재 피해는 우리만이 겪는 일도 아니다. 금년 여름 유럽의 대홍수는 각국의 유서 깊은 문화재에 깊은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그 피해는 정부와 시민들의 질서있고 체계적인 대응이 있었기에 최소한에 그쳤다. 자연재해야 막을 수 없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고, 사전에 준비를 갖추는 일이다. 경포대의 붕괴 위기는 어쩌면 30여년 전 경포호 일주도로를 만들 때 이미 예고된 일인지도 모른다. 李鮮馥 (서울대 교수·고고미술사학) 출처 - 조선일보 2002. 9. 6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