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지역할당` 논의해볼만
2002-07-29
서울대 `지역할당` 논의해볼만 “지역별로 인구비례에 따라 쿼터를 정해 신입생을 뽑을 수 있다”는 신임 정운찬 서울대 총장의 말 한마디가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역분권을 주장하는 다양한 목소리가 제기됐지만 그 때마다 별 반향 없이 간과됐던 것을 생각하면 서울대의 힘이 새삼 느껴져 씁쓸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학이지만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한국 최고의 대학이니 어찌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모든 문제가 서울대 독점 체제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 식지 않고 있다. 서울대의 힘은 사실 이 대학이 가지고 있는 경쟁력 자체보다는 전국의 모든 수험생을 일렬로 세워 선발하는 현행 입시제도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대가 실제로 좋으니까 모두가 기를 쓰고 들어가려고 하기도 하겠지만, 모든 사람이 서울대를 원하니까 서울대가 좋은 대학이라는 무의식적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부인할 수 없는 우리 국민 대다수의 서울대 선호 현상은 능력 평가의 잣대를 획일화함으로써 오히려 경쟁력을 약화하고 있다. 신임 서울대 총장의 발언은 이러한 문제 인식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처음에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단순한 개인 생각’이라는 정 총장의 해명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 발언이 진지한 논의로 이어지기보다는 일과성 해프닝으로 끝날 조짐이 보이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숙고하지 않고서 신임 총장이 이런 발언을 했을 리 만무한데도, 사회 일각에서는 ‘너무 성급하다’, ‘중대한 사안이니 신중했어야 한다’고 질책함으로써 논의조차 거부하려 한다. 반론의 핵심은 지역할당제가 오직 ‘실력’의 기준만을 인정하는 자유경쟁을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경쟁 제도와 지역할당 제도는 정말 상호 모순적인가? 나는 오히려 불평등 구조가 경직된 사회에서는 지역할당 제도가 자유경쟁을 촉발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첫째, 실력을 제외한 모든 조건이 비교적 평등할 때에만 자유경쟁은 정당하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자신의 실력밖에 없는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하기만 하면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었던 적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진 자만이 교육을 잘 받을 수 있고, 교육받은 자만이 부를 가질 수 있는 폐쇄적 계급체제의 핵심에 서울대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과연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면 서울대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제외한 다른 사회적 조건들이 정말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유경쟁은 그 이념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불평등 구조를 심화시킬 뿐이다. 둘째, ‘지역’은 이미 우리 사회의 가장 결정적인 불평등 요소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이면 모두 ‘서울대’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서울과 지방의 문화적 격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자연스러운 실력의 차이는 물론 인정돼야 한다. 그렇지만 영어를 잘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축구를 잘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한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인정받은 특권이 다른 분야에서의 특권까지 보장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우연히 어느 지역에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떻게 모든 영역에서의 특권을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끝으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려면 다양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평가기준이 개발돼야 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차별철폐조치(affirmative action)에 따라 소수민족에게 할당제를 시행하고 있는 미국 대학들의 경험은 각계 각층의 학생들이 모임으로써 자유경쟁의 원리가 훼손되기는커녕 오히려 경쟁력이 향상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자유경쟁은 이처럼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역할당제가 단순히 지역에 따라 신입생을 물리적으로 ‘안배’하는 입학제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공정한’ 경쟁제도를 만들자는 도전적이고 건설적인 제안이다. 민주사회의 기본가치인 기회균등이라는 말 자체가 웃음거리가 될 정도로 지역 불평등이 심각하다면, 우리는 서울대 총장의 진지한 발언을 그냥 웃어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 하면 지역할당제는 사회적 조건이 공정하지 않을 때 자유경쟁을 실현하는 차선의 한시적 제도이기 때문이다. 이진우 (계명대 철학 교수) 출처 - 문화일보 2002. 7. 29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