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민주주의의 위기는 새삼스러운 말이 아니다. 정당이 사당화, 지역당화 되어 있는 우리 나라는 더욱 그렇다. 국회는 국리민복보다는 당리당략으로 지새며 국민을 소외시켜 버린다. 그럼에도 최소한 정기적인 선거, 입법청원, 시민단체나 이익단체의 의정감시를 통하여 낮은 수준의 입법참여는 이루어진다. 행정참여도 마찬가지이다. 대통령 직선, 국회의 국정감사, 지방자치, 시민단체의 행정감시, 행정절차에서의 주민참여 등 그나마 보장책이 있다.
그러나 사법에 이르면 문제가 달라진다. 사법의 독립이라는 거대한 명제에 막혀 참여는 커녕 비판·감시조차도 조심스런 실정이다. 단지 원·피고, 피의자·피고인으로서 사법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러면 과연 사법의 독립과 사법에의 참여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사법의 본질적 요소는 법관과 재판의 독립보장, 즉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법관이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하고, 입법, 행정 뿐 아니라 사회세력, 여론으로부터도 독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삼권분립도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작동시키기 위해 국가권력을 기능적으로 분리한 데 따른 것이므로, 국가권력의 일부인 사법권도 그 원천은 결국 주권자인 국민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사법권의 독립도 국민으로부터의 독립에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다. 권력분립이나 사법권 독립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사법에 참여해야 할 법리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 국민이 사법에 참여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이나 당위성은 있는가? 유전무죄·무전유죄, 유권무죄·무권유죄라는 비아냥 섞인 조어가 횡행하듯이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반드시 높다고 할 수 없다. 고등고시, 사법시험 등의 높은 진입장벽이나 오직 법조인에 의한 법조인의 사법제도 하에서, 일반 국민들은 사법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유보하고 있다. 국민이 사법을 훤히 들여다보고 거기에 참여하여 스스로 그 구성과 작용의 일부를 담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법신뢰가 확보될 것이다. 헌법개정 등 난제가 가로 놓여 있으나 공론화는 빠를수록 좋으리라.
국민의 사법참여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우선 사법의 구성, 다음 사법의 작용에의 참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는 직업법관을 선임하는 일에, 후자는 재판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먼저, 일반 국민이 법관의 선임에 참여할 수 있는가? 우리의 관료사법에 따르면, 법관은 사법시험에 합격한 일정 자격자를 대법원장이 임용하고, 대법관이나 대법원장만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도록 되어 있다. 대법원 구성에 국회동의라는 간접적인 참여가 있는 것 이외에는 전혀 국민참여의 길이 없는 셈이다. 대법관 임명에 법관추천회의의 제청이라는 절차가 있어 재야법조 등의 공식적인 참여가 보장된 일도 있었으나 현재에는 그마저 폐지되었다.
외국의 사례들에서 보듯이 우리도 일정한 수준의 고위 법관에 대해서는 선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학총장, 교육감, 조합장 선거 등의 경우를 보면, 우리 풍토에서 선거가 갖는 문제점은 많다. 그러나 선출되지 않는 권력에 그 많은 권한을 주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주민 직선이 문제가 많다면 선거인단의 간선이나 법률가들에 의한 선출도 적극 고려해 보아야 하고, 법관추천회의 부활 등 중간단계를 설정하여 점진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다음, 국민이 재판에 참여하는 길은 무엇인가? 중재, 조정, 특허재판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 비법관의 재판참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일반 국민이 일반 재판에서 법관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길은 철저히 봉쇄되어 있다. 여기에 중점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 배심제와 참심제이다.
배심제는 주로 영미사법에서 보듯이 일반 국민으로 이루어진 배심원들이 형사소송에서 기소여부를 결정하거나, 민·형사소송에서 사실문제나 책임문제를 확정하는 제도이다. 사실문제에 한하긴 하나 전문법관의 직업적 한계를 일반인의 상식, 법감정 등으로 보완할 수 있으며, 일반 국민 스스로 재판에 참여함으로써 준법정신, 인권의식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혈연·지연·학연 등 연고주의, 그리고 법보다는 전통적인 규범의식이 뿌리깊은 한국사회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이 제도가 과연 미국 등에서와 같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따라서 부분적인 시범실시 등 점진적 시도를 통하여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참심제의 경우는 배심제의 난점을 비교적 용이하게 극복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많은 학자, 전문가들이 도입에 훨씬 적극적이다. 참심제란 독일의 명예법관제처럼 일반 국민이 아예 재판부의 일원이 되어 법관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제도이다. 우선 특허, 의료, 행정, 국제거래 등 전문적 식견이 요구되는 재판에 그 분야 전문가를 참여시키는 데서 출발하여 점차 참여의 폭을 확대해 간다면 참심제의 정착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사법 쪽에서 본다면 문외한의 참여가 썩 달가울 리는 없을 것이다. 최근 일부 판결에 대해 관련 시민단체 등에서 강한 비판을 제기하자, 사법부는 사법의 독립이라는 명분으로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일이 있다. 그러나 사법의 독립은 사법의 독점이 아니다. 국민이 참여하는 사법 자체가 독립적으로 재판할 때 비로소 완전한 사법의 독립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 사법제도의 모델이 되었던 일본에서 최근 다년간의 연구 끝에 배심제 도입 등 획기적인 제도 개혁안을 내놓고 있는 것도 시사하는 바 크다.
빠르게 변하는 정보화 시대에 국민의 참여욕구도 어느 때보다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참여민주주의의 심화를 통해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일은 사법분야라고 하여 피해갈 수는 없는 시대적 요청이다.
참여하는 사법을 위하여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는 새삼스러운 말이 아니다. 정당이 사당화, 지역당화 되어 있는 우리 나라는 더욱 그렇다. 국회는 국리민복보다는 당리당략으로 지새며 국민을 소외시켜 버린다. 그럼에도 최소한 정기적인 선거, 입법청원, 시민단체나 이익단체의 의정감시를 통하여 낮은 수준의 입법참여는 이루어진다. 행정참여도 마찬가지이다. 대통령 직선, 국회의 국정감사, 지방자치, 시민단체의 행정감시, 행정절차에서의 주민참여 등 그나마 보장책이 있다.
그러나 사법에 이르면 문제가 달라진다. 사법의 독립이라는 거대한 명제에 막혀 참여는 커녕 비판·감시조차도 조심스런 실정이다. 단지 원·피고, 피의자·피고인으로서 사법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러면 과연 사법의 독립과 사법에의 참여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사법의 본질적 요소는 법관과 재판의 독립보장, 즉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법관이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하고, 입법, 행정 뿐 아니라 사회세력, 여론으로부터도 독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삼권분립도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작동시키기 위해 국가권력을 기능적으로 분리한 데 따른 것이므로, 국가권력의 일부인 사법권도 그 원천은 결국 주권자인 국민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사법권의 독립도 국민으로부터의 독립에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다. 권력분립이나 사법권 독립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사법에 참여해야 할 법리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 국민이 사법에 참여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이나 당위성은 있는가? 유전무죄·무전유죄, 유권무죄·무권유죄라는 비아냥 섞인 조어가 횡행하듯이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반드시 높다고 할 수 없다. 고등고시, 사법시험 등의 높은 진입장벽이나 오직 법조인에 의한 법조인의 사법제도 하에서, 일반 국민들은 사법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유보하고 있다. 국민이 사법을 훤히 들여다보고 거기에 참여하여 스스로 그 구성과 작용의 일부를 담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법신뢰가 확보될 것이다. 헌법개정 등 난제가 가로 놓여 있으나 공론화는 빠를수록 좋으리라.
국민의 사법참여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우선 사법의 구성, 다음 사법의 작용에의 참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는 직업법관을 선임하는 일에, 후자는 재판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먼저, 일반 국민이 법관의 선임에 참여할 수 있는가? 우리의 관료사법에 따르면, 법관은 사법시험에 합격한 일정 자격자를 대법원장이 임용하고, 대법관이나 대법원장만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도록 되어 있다. 대법원 구성에 국회동의라는 간접적인 참여가 있는 것 이외에는 전혀 국민참여의 길이 없는 셈이다. 대법관 임명에 법관추천회의의 제청이라는 절차가 있어 재야법조 등의 공식적인 참여가 보장된 일도 있었으나 현재에는 그마저 폐지되었다.
외국의 사례들에서 보듯이 우리도 일정한 수준의 고위 법관에 대해서는 선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학총장, 교육감, 조합장 선거 등의 경우를 보면, 우리 풍토에서 선거가 갖는 문제점은 많다. 그러나 선출되지 않는 권력에 그 많은 권한을 주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주민 직선이 문제가 많다면 선거인단의 간선이나 법률가들에 의한 선출도 적극 고려해 보아야 하고, 법관추천회의 부활 등 중간단계를 설정하여 점진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다음, 국민이 재판에 참여하는 길은 무엇인가? 중재, 조정, 특허재판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 비법관의 재판참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일반 국민이 일반 재판에서 법관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길은 철저히 봉쇄되어 있다. 여기에 중점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 배심제와 참심제이다.
배심제는 주로 영미사법에서 보듯이 일반 국민으로 이루어진 배심원들이 형사소송에서 기소여부를 결정하거나, 민·형사소송에서 사실문제나 책임문제를 확정하는 제도이다. 사실문제에 한하긴 하나 전문법관의 직업적 한계를 일반인의 상식, 법감정 등으로 보완할 수 있으며, 일반 국민 스스로 재판에 참여함으로써 준법정신, 인권의식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혈연·지연·학연 등 연고주의, 그리고 법보다는 전통적인 규범의식이 뿌리깊은 한국사회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이 제도가 과연 미국 등에서와 같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따라서 부분적인 시범실시 등 점진적 시도를 통하여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참심제의 경우는 배심제의 난점을 비교적 용이하게 극복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많은 학자, 전문가들이 도입에 훨씬 적극적이다. 참심제란 독일의 명예법관제처럼 일반 국민이 아예 재판부의 일원이 되어 법관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제도이다. 우선 특허, 의료, 행정, 국제거래 등 전문적 식견이 요구되는 재판에 그 분야 전문가를 참여시키는 데서 출발하여 점차 참여의 폭을 확대해 간다면 참심제의 정착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사법 쪽에서 본다면 문외한의 참여가 썩 달가울 리는 없을 것이다. 최근 일부 판결에 대해 관련 시민단체 등에서 강한 비판을 제기하자, 사법부는 사법의 독립이라는 명분으로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일이 있다. 그러나 사법의 독립은 사법의 독점이 아니다. 국민이 참여하는 사법 자체가 독립적으로 재판할 때 비로소 완전한 사법의 독립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 사법제도의 모델이 되었던 일본에서 최근 다년간의 연구 끝에 배심제 도입 등 획기적인 제도 개혁안을 내놓고 있는 것도 시사하는 바 크다.
빠르게 변하는 정보화 시대에 국민의 참여욕구도 어느 때보다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참여민주주의의 심화를 통해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일은 사법분야라고 하여 피해갈 수는 없는 시대적 요청이다.
박인제(비전@한국 공동대표, 변호사)
출처 - 비전@한국홈페이지 회원칼럼
* 위 글의 내용은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의 공식적인 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