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페미니즘 시대
	2002-07-16
포스트페미니즘 시대 대한민국이 지금 포스트 월드컵 시대를 향해 가고 있다면, 우리 여성들은 '포스트 페미니즘 시대'를 열어 가고 있다. '포스트 페미니즘 시대'의 첫 번째 특징은 여성들 내부의 다양성이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제 더 이상 '여성'은 페미니즘이라는 깃발 아래 '성'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묶일 수 있는 집단이 아니다. '여성'을 지칭할 때 우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지 명확히 규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일례로 군 가산점제 폐지 문제가 핫 이슈로 등장했을 때 아들을 둔 어머니 세대와 공무원이 되고 싶은 딸 세대 사이에는 미묘한 전선(戰線)이 형성되었다. 또한 모성보호 규정이든 친양자제 도입에 대해서도 모든 여성이 하나 되어 환영의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각자의 자리에 서서 무엇이 가장 유리한가를 계산하게 되었다. 이는 여성 집단 내부에서 세대, 학력 수준, 경제적 지위, 결혼 지위 등을 축으로 하여 다양한 분화 및 이질화 과정이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의 와중에서 "이제 페미니즘 운동은 종언을 고했노라"는 주장이 들려오기도 한다. 실제로 신세대 여성들 스스로 "여성의 '여'자만 들어도 싫증난다"는 고백을 하는 상황이고 보니 앞서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만도 하다. 정말 페미니즘 운동은 종언을 고한 것일까? 이는 페미니즘이 제기했던 쟁점들이 일상의 담론 속에 녹아 들어감으로써 여성, 그들의 문제로부터 우리 모두의 문제로 확대된다는 '포스트 페미니즘 시대'의 두 번째 특징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취업여성의 보육문제 해결을 위해 보육 책임이 여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고용하는 기업과 차세대를 키워내야 하는 사회가 함께 공유해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것이라든가, 여성 억압 및 통제 메카니즘으로서 우리의 역사 속에서 은밀한 형태로 존재해왔던 바 성희롱 및 성폭력을 성차별의 이슈로 가시화시킨 것이라든가, 우리의 명절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체화되었던 남성중심적 요소들을 거두어내고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가족의례를 구성해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든가, 이 모든 작업은 페미니즘 운동이 지향하는 바 이념을 일상 속에서 구현하기 위한 '페미니즘의 생활화'이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 운동은 그 어떤 사회운동 못지 않게 이론과 실천의 통합 자체를 주요 목표로 설정해왔다. 그런 만큼 운동 초기에는 문제로 의식조차 되지 않았던 쟁점들을 의식선상으로 끌어올리는 데 주력했다면, 지금은 그 문제들을 일상으로 끌어들여 생활 속의 실천을 통해 해결을 모색해보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봄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고 '포스트 페미니즘 시대' 여성의 상황이 낙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포스트 페미니즘의 세 번째 특징은 여성에 대한 명백한 제도적 차별은 완화되어 가는 한편으로 미묘한 상황적 차별은 보다 정교해지는 현상이다. 실제로 명백한 제도적 차별을 대신해서 기득권을 누려왔던 층의 강고한 저항과 미묘한 차별이 곳곳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여성의 취업률 증가 이면에 비정규직 및 파트 타임직의 증가라는 고용불안정이 자리하고 있는 현실이나, 높은 교육수준과 탁월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 최하위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여성의 정치적 지위(2000년 기준 한국의 여성권한척도는 세계 70개국 중 63위)는 물론이고, 거의 반세기를 호주제 폐지를 위해 투쟁해왔으나 여전히 높기만 한 국민 정서의 벽 등은 여성이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한 여정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포스트 월드컵시대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월드컵을 중심으로 다양한 집단들이 한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외쳤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발전적인 포스트 월드컵 시대란 아마도 다시 각자의 이질적인 이익을 가진 다양한 집단으로 돌아가도 월드컵 기간 동안에 우리가 보여주었던 그 어떤 정신을 잃지 않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흔히 21세기를 일컬어 여성의 세기라 한다. '포스트 페미니즘 시대'에 접어든 우리 앞에는 이토록 멋진 구호 속에서 다양화된 여성들간에 수평적-수직적 연계망의 고리를 촘촘히 짜 나가는 동시에 우리의 영원한 동지 남성들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구체적인 비전을 차세대 여성들에게 물려주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최샛별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처 - 세계일보 2002. 7. 16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