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 잊고 있는 것

지금에 와서야 민주주의를 논의할 때면 마치 미국이 가장 앞서가는 듯이 생각하지만 18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민주주의는 결코 자랑할 것이 못되었다.

남북전쟁 중인 1863년에 노예 해방이 선언되고 북군의 승리와 함께 노예에게도 참정권이 부여되면서 흑인의 참정권도 인정되었다.

***지방선거일 하루전 맞나

그러나 그들에게 보통선거는 허락되지 않았다.모든 주민은 인두세를 지불하고서야 투표 용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격동의 시절에 흑인들은 더 많은 권익을 얻기 위해 대거 인두세를 지불하고 투표권을 얻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어느 주의 백인 후보는 유명한 곡예단을 유치하여 흥행을 시작했다. 흑인들이 표를 사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런데 흥행주는 묘한 조건을 제시했다. 즉 인두세의 영수증을 제시하는 사람에게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목전의 즐거움에 빠진 흑인들은 세금 영수증과 입장권을 맞바꿨고, 그 결과 선거를 통해 자신의 인권을 신장하려던 흑인들의 꿈도 함께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4년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사려 깊지 못한 그들의 순간적인 방심의 대가치고는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월드컵의 함성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하기야 48년만에 첫 승리며 이를 통한 국가 이익이 천문학적 숫자라니 이를 국운 상승의 도약대로 삼으려는 정치권이나 이에 감격하는 국민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민족이 본래부터 운동경기에 그토록 탐닉하는 민족은 아니었다.

암울하던 우익 군부독재 시절에 김일과 홍수환을 보면서 독재나 부패한 정치를 외면하도록 오랫동안 길들여온 탓으로 이제는 마치 스포츠 없이는 못 사는 민족처럼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 당장 내일로 다가온 6.13 선거다. 아마도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 국민들로 하여금 이번 선거에 더욱 무관심하도록 만들지도 모른다.

그 인물이 그 인물이라는 인식이 작용할 수도 있다. 입후보자들의 높은 전과율이나 정보에 접근하기 어려운 점이 정치적 무관심을 더욱 부채질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계제에 월드컵 경기마저 겹쳐 투표율이 저조하다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어느 선거인들 중요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랴만, 이번 선거는 참으로 중요하다.

왜 그런가. 민주주의란 결국 얼마나 유서 깊고 연륜이 긴가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민주주의란 정치적 경험의 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지난날의 지방자치의 좌절된 역사를 제외한다면 이제 우리의 지방자치의 연조는 겨우 8년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에 퇴보란 없이 오직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나으리라는 희망 속에 사는 것이라 하더라도 한국 민주주의는 향후 30년, 즉 적어도 10회 정도의 지방 자치 선거를 치른 후에야 겨우 뿌리를 내릴 수 있으리라고 계산한다면 지금의 시점은 겨우 떡잎을 보는 시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잘 가꿔야 한다.

***정치 바꾸려면 투표해야

정치적 부패나 악정은 음지식물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교묘하게도 국민의 눈길을 피하며 살아간다. 국민이 깨어 있을 경우에 정치가 잘못되는 경우란 없다. 따라서 흠이 많은 정치인이라면 국민이 운동경기의 환호 속에 정치를 잊어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어찌 이번 선거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 과열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동안에 정치가 정도를 벗어나 부패하거나 학정으로 바뀐 역사적 사례는 수없이 많다.

처음의 흑인사회의 얘기로 되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월드컵 축구에 빠져 투표에 기권하고 정치는 결국 뒷전으로 밀려난다면 그 흑인들이나 우리가 뭐 다를 것이 있겠는가.

이와 같은 정치적 무관심과 관련하여 정치학의 교과서에는 이렇게 써 있다. "자신의 권리를 외면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가장 가혹한 업보는 그 국민으로 하여금 그들이 경멸하던 정치인들의 지배를 받게 만드는 것이다."

申福龍 (건국대 교수·정치학)
출처 - 중앙일보 2002. 6. 12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