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文學의 진정한 위기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방송작가들이 작성한 시나리오를 먼저 받게 된다. 그런데 그 시나리오에는 모범답안까지 미리 작성되어 있어서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비록 그 모범답안이 대단히 유용하지만, 그걸 따라 하다 보면 어쩐지 방송국에서 시키는 대로 말을 하는 허수아비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시청자들이 보고 듣는 방송 프로들이 생생한 말을 주고받는 생동감 있는 현장이라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각본과 편집에 의해 통제된 제작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방청객이 있는 프로일 경우에는 시나리오 중간중간에 ‘웃음’이라는 지시문까지 들어가 있어 방청객들이 웃어야 할 시점까지도 암시해 놓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는 텔레비전 프로들을 ‘에코그라피’라고 부른다. 시청자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가 화면에서 보는 것은 원형의 메아리이자 원본의 반향을 나타내는 의학적 그래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해체이론’에서 글보다 말을 더 중요시해 온 서구 형이상학을 비판하며 글의 힘을 강조하는 데리다에게 텔레비전 프로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좋은 경우가 된다. 그러나 컴퓨터로 오면 텔레비전 시대 이론가인 데리다의 비판은 설득력을 잃는다. 이어령 교수의 지적대로, 다매체 연결과 쌍방교류를 본질로 하는 컴퓨터 대화방에서는 말과 글이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과 패러다임이 바뀌는 바로 그 공간에서 지금 새로운 형태의 문학과 작가들과 독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즉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제는 문학의 개념 자체도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책을 읽거나 TV를 보는 대신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는 우리의 청소년들을 외면한 채, 그리고 더 이상 팔리지 않는 문예지들의 암담한 현실을 애써 부정한 채, 우리는 아직도 문학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따라서 문학과 예술의 개념이 바뀌어지고 그 매체와 표현양식이 급속도로 달라지고 있는 이 변화의 시대에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문학권력’이 첨예한 관심사가 되며 ‘문단파벌’이 문인들의 주요 논쟁거리가 된다. 문학의 위기를 감지하고 활로를 탐색하며 비전을 제시해 주어야 할 비평가들이, 또 참신한 상상력과 새로운 창작양식으로 문학의 소생과 르네상스를 시도해야 할 작가들이 문학의 미래보다는 파벌형성과 문예지를 통한 권력행사에 더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은 결코 권력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권력의 반대 편에 서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부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은 문학의 본질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문학을 권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글이 과연 우리에게 감동을 주며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흔히 영상매체나 전자매체 때문에 문학이 위기를 겪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문학의 진정한 위기는 시대의 변화에 둔감하고 인식의 변화를 거부하며, 아직도 문학을 권력과 헤게모니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우리의 진부한 사고방식으로부터 기인한다.

어제 개막된 월드컵 역시 세계인의 축제로 만들려면 이제 승부에만 집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계 각국 손님들을 불러모아 벌이는 지구촌의 문화잔치는 그것만으로도 흥겹고 보람 있는 일인데, 굳이 승부에 목숨을 걸어야만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불과 몇 십년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데리다의 이론마저도 구식이 되는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언제까지 변화를 거부하고 위기를 외면한 채, 구태의연한 편 가르기와 권력추구를 계속할 것인가.

김성곤 (서울대 언어교육원장ㆍ영문학)
출처 - 조선일보 2002. 6. 1 문화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