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 문제가 불거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반도체 경기가 급락했던 1996년부터 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와 LG반도체에 대한 일부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경제위기로 인해 상황이 악화된 1998년에는 빅딜이 추진되었고, 1999년과 2000년에 회복되었던 반도체 경기가 다시 급락한 2001년에는 대규모 증자와 채무조정이 이뤄졌다. 그 후 마이크론과의 매각협상이 추진되었으나, 채권단과 마이크론이 제시한 자산매각 방안을 하이닉스 이사회가 지난 4월 30일 만장일치로 부결시킴으로써 하이닉스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이닉스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지 5년이 지난 지금까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또다시 생사의 갈림길에 선 하이닉스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메모리반도체 산업의 특성을 파악한 후 하이닉스의 재무구조와 조직구조를 분리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이닉스의 재무구조에 대한 분석 없이 외형적인 조직구조에 초점을 맞춰 인수·합병이나, 자산매각, 기업분할을 논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접근방법이다. 하이닉스에 대한 처리방안은, 경제위기 이후 금융체체의 변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경제성 원칙과 손실부담 원칙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즉, 하이닉스의 수익창출 능력을 평가하여 기업을 존속시킬 것인지 청산시킬 것인지를 결정하고, 담보 유무 등을 감안하여 이해관계자간에 비용과 편익을 공정하게 나누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업의 기존 재무구조와 미래 수익창출 능력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해관계자간에 합의를 도출하는 데 노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기업을 합치거나 쪼개는 외형적인 구조조정에 치중한 것이 하이닉스 문제가 표류하게 된 원인이다.
대박사업과 도박경영
메모리반도체사업은 수급변동에 따른 제품가격의 등락이 극심한 산업이다. 대규모 설비투자가 요구되는 반도체산업의 특성상 수요가 증가할 때 생산이 신속하게 증가할 수 없기 때문에 제품가격은 급등하게 된다. 1995년과 2000년에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대박을 터뜨렸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반대로 1996년과 2001년처럼 수요가 감소하게 되면 제조업체들간의 (암묵적) 담합이 없는 한 가격은 폭락한다. 물량보다는 단가 위주로 수급이 조절되는 것이다. 동시에 반도체는 기술진보가 급속하게 이뤄지는 사업이다. 공급업체가 연구개발과 신규 설비투자를 지속적으로 수행하지 않을 경우, 수요가 증가한다고 해도 차세대 제품을 상용화한 경쟁업체에게 완전히 밀려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반도체산업의 특성을 감안할 때 제조업체는 수급변동으로 가격이 폭락할 경우에 대비하여 채무부담을 줄이고 건실한 재무구조를 유지하는 한편, 신규 설비투자에 필요한 현금흐름을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반도체산업의 후발주자로서 생산능력을 단기간에 확충하기 위해 차입금을 대규모로 조달했다. 경제위기 이전 대마불사의 신화를 믿었던 금융기관들도 투자의 타당성을 제대로 따지지 않고 돈을 빌려줬다. 반도체처럼 수급변동에 따른 제품가격의 등락이 극심한 산업분야에서 차입금에 의존하여 대규모 투자사업을 추진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그 결과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삼성전자 등 기존업체에 비해 사업초기부터 열악한 재무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1991년 삼성전자의 차입금이 매출액의 50% 정도였던 데 반해 현대전자의 차입금은 매출액의 110%를 넘었다. 물론 기존업체보다 후발주자의 수익성이 훨씬 높았다면 재무건전성 격차가 좁혀질 수 있었겠지만,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기존업체와 비슷한 수준의 영업수익성을 기록했다. 즉, 두 회사는 공격적인 차입경영을 통해 단기간에 생산능력을 확충하고 어느 정도 기술력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과도한 채무부담을 해소할 만큼 수익성을 제고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경제위기가 닥친 1997년, 삼성전자의 매출액 대비 차입금이 56%였던데 반해 현대전자의 매출액 대비 차입금은 153%에 이르렀다. 1996년에 반도체 경기가 급락하고 1997년 말 원화환율의 폭등으로 인해 원화로 환산한 외화차입금 부담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위기상황에 접어들고 있었다.
잘못된 처방과 빗나간 비판
1998년 초부터 현대전자와 LG반도체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으나, 유감스럽게도 논의의 초점은 재무구조의 건전성 대신 설비의 과잉 여부에 맞춰졌다. 경제위기 발생 직후의 공황적인 상황에서 설비의 과잉 여부는 수요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결과였다. 수요가 회복되면 과잉설비 문제는 해소될 것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빅딜이 과잉설비 문제의 해법으로 제시된 것은 더욱 더 이해하기 힘들다. 사업을 맞교환하거나 통합한다고 해서 설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논리싸움에서 밀리자 빅딜 옹호론자들은 빅딜을 통해 규모의 경제와 시너지 효과가 제고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빅딜은 연막이었고 빅딜 옹호론자들이 바랐던 것은 특혜성 금융지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빅딜 반대론자들 중 대다수는 현대전자와 LG반도체를 반강제적으로 통합시키는 것은 비판했지만, 두 회사를 각각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 중 일부는 '기업구조조정을 시장에 맡기라'고 주장하면서 사실상 현상유지 정책을 옹호하기도 했다. 1998년 당시 5대 재벌의 계열사에 대해서도 예외를 두지 말고 워크아웃 등을 적용하여 재무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한편 경영책임을 추궁하도록 주장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최근 일각에서는 하이닉스 문제와 관련하여 빅딜 원죄론을 제기하고 있으나, 이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빅딜에 따른 인수대금의 단기 지급으로 인해 하이닉스의 유동성 문제가 가중된 측면은 있지만, 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빅딜이 이뤄지기 훨씬 전부터 불안한 재무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빅딜은 하이닉스의 재무구조 문제를 해소하지 못했지만, 없었던 문제를 만들어냈던 것도 아니다. 1999∼2000년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감춰졌던 재무구조의 건전성 문제는 2001년 반도체 경기가 급락하면서 다시 대두하게 되었다.
하이닉스는 어디로...
2001년에 하이닉스는 전체 차입금의 80%를 갚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하이닉스는 회사채신속인수제도와 12.5억 달러 규모의 GDR 발행을 통해 유동성 문제를 해소하려고 했으나, 하이닉스의 재무구조 문제는 단순한 유동성 문제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반도체 가격이 폭락하여 2001년에 매출이 무려 55%나 감소함에 따라 채권단은 하이닉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결국 채권단은 출자전환 2.9조원, 채무면제 1.4조원, 신규자금 6500억 원 등을 포함하는 대규모 채무조정을 단행했다. 하지만, 채무조정 후에도 하이닉스의 매출액 대비 차입금은 무려 151%나 되기 때문에 하이닉스는 당장은 살아있지만 아직도 불안한 재무구조를 가지고 있다. 물론 2001년의 반도체 경기가 워낙 좋지 않아서 매출이 급감했기 때문에 매출액 대비 차입금 비율이 상승한 측면도 있지만, 하이닉스의 채무부담은 아직도 과도한 것으로 보인다. 1998년과 비교할 때 문제의 본질은 변한 것이 없다.
이제라도 채권단은 기존의 채권은 일단 제쳐두고 하이닉스의 경쟁력을 냉정하게 평가하여 하이닉스를 존속시키는 것이 나은지 청산시키는 것이 나은지 결정해야 한다. 청산시키는 것이 낫다면 설비를 뜯어 팔아 채권을 회수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하이닉스를 존속시키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된다면 반도체산업 특성상 지속적인 설비투자에 필요한 자금조달 방안도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이닉스의 미래수익을 가지고 도저히 갚을 수 없을 것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출자전환 등 채무조정이 이뤄져야 한다.
사실 이번에 채권단이 마이크론과의 매각협상에서 제시한 안은 이와 같은 채무조정의 틀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채권단은 하이닉스의 메모리반도체 사업부문을 인수하여 마이크론이 신설할 마이크론 코리아에 15억 달러의 신규자금을 설비투자용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이 신규자금에 대해서는 마이크론 본사의 지급보증이 없다. 채권단은 사실상 하이닉스 메모리반도체 부분의 미래 수익창출 능력을 믿고 돈을 추가적으로 빌려주기로 한 셈이다.
물론 마이크론이 하이닉스보다 월등히 뛰어난 기술력과 경영능력을 보유한 회사라면 현재 하이닉스 메모리반도체 부분의 경쟁력을 상당히 개선시킬 수 있겠지만, 마이크론은 BB-의 신용등급을 가지고 있는 회사로서 하이닉스와 대동소이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점에서 마이크론은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GM과 대비된다.
또, 채권단은 하이닉스의 부채 6조 7천억 원 중 3조 원을 추가로 조정하여 3조 7천억 원만을 남겨주기로 했다. 문제는 3조 7천억 원의 잔존 부채 전체를 하이닉스의 잔존 비메모리 부문에 넘기기로 한 점이다. 하이닉스의 비메모리 부문의 연간 매출액은 1조원도 되지 않는다. 메모리 부문의 자산은 부채 없이 마이크론에 매각하고 하이닉스 전체 매출액의 20% 정도밖에 되지 않는 비메모리 부문이 남은 부채를 책임지도록 한 것이다. 마이크론이 지불하는 대가는 신주 1억 860만주와 현금 2억 달러 뿐이다. 마이크론 주가 변화에 대한 리스크는 전적으로 채권단이 지도록 되어 있었다. 결국
이와 같은 조건으로 매각이 이뤄졌다면 하이닉스는 메모리 부문을 마이크론에 넘기고, 과도한 채무부담으로 생존가능성이 거의 없는 비메모리 부문을 떠안게 되었을 것이다. 하이닉스 주주의 권익을 보호해야 하는 이사회가 이와 같은 매각방안을 거부한 것은 당연하다고 판단된다.
지금이라도 채권단은 하이닉스의 재무구조 문제와 조직구조 문제를 분리하여 경제성 원칙과 손실부담 원칙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미 마이크론과의 협상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하이닉스의 존속가치가 청산가치보다 높지만 부채 전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된다면 추가적인 채무조정이 이뤄져야 한다. 신규자금에 대해서는 금융기관이 각각 얼마씩 부담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하고 하이닉스의 주주들도 증자 등을 통해 참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만약 이해관계자들간에 합의를 이룰 수 없다면 회사정리(법정관리) 절차를 통해 법원에서 해결책을 도출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하이닉스반도체 : 대마불사(大馬不死)에서 생불여사(生不如死)로
하이닉스 문제가 불거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반도체 경기가 급락했던 1996년부터 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와 LG반도체에 대한 일부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경제위기로 인해 상황이 악화된 1998년에는 빅딜이 추진되었고, 1999년과 2000년에 회복되었던 반도체 경기가 다시 급락한 2001년에는 대규모 증자와 채무조정이 이뤄졌다. 그 후 마이크론과의 매각협상이 추진되었으나, 채권단과 마이크론이 제시한 자산매각 방안을 하이닉스 이사회가 지난 4월 30일 만장일치로 부결시킴으로써 하이닉스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이닉스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지 5년이 지난 지금까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또다시 생사의 갈림길에 선 하이닉스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메모리반도체 산업의 특성을 파악한 후 하이닉스의 재무구조와 조직구조를 분리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이닉스의 재무구조에 대한 분석 없이 외형적인 조직구조에 초점을 맞춰 인수·합병이나, 자산매각, 기업분할을 논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접근방법이다. 하이닉스에 대한 처리방안은, 경제위기 이후 금융체체의 변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경제성 원칙과 손실부담 원칙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즉, 하이닉스의 수익창출 능력을 평가하여 기업을 존속시킬 것인지 청산시킬 것인지를 결정하고, 담보 유무 등을 감안하여 이해관계자간에 비용과 편익을 공정하게 나누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업의 기존 재무구조와 미래 수익창출 능력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해관계자간에 합의를 도출하는 데 노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기업을 합치거나 쪼개는 외형적인 구조조정에 치중한 것이 하이닉스 문제가 표류하게 된 원인이다.
대박사업과 도박경영
메모리반도체사업은 수급변동에 따른 제품가격의 등락이 극심한 산업이다. 대규모 설비투자가 요구되는 반도체산업의 특성상 수요가 증가할 때 생산이 신속하게 증가할 수 없기 때문에 제품가격은 급등하게 된다. 1995년과 2000년에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대박을 터뜨렸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반대로 1996년과 2001년처럼 수요가 감소하게 되면 제조업체들간의 (암묵적) 담합이 없는 한 가격은 폭락한다. 물량보다는 단가 위주로 수급이 조절되는 것이다. 동시에 반도체는 기술진보가 급속하게 이뤄지는 사업이다. 공급업체가 연구개발과 신규 설비투자를 지속적으로 수행하지 않을 경우, 수요가 증가한다고 해도 차세대 제품을 상용화한 경쟁업체에게 완전히 밀려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반도체산업의 특성을 감안할 때 제조업체는 수급변동으로 가격이 폭락할 경우에 대비하여 채무부담을 줄이고 건실한 재무구조를 유지하는 한편, 신규 설비투자에 필요한 현금흐름을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반도체산업의 후발주자로서 생산능력을 단기간에 확충하기 위해 차입금을 대규모로 조달했다. 경제위기 이전 대마불사의 신화를 믿었던 금융기관들도 투자의 타당성을 제대로 따지지 않고 돈을 빌려줬다. 반도체처럼 수급변동에 따른 제품가격의 등락이 극심한 산업분야에서 차입금에 의존하여 대규모 투자사업을 추진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그 결과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삼성전자 등 기존업체에 비해 사업초기부터 열악한 재무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1991년 삼성전자의 차입금이 매출액의 50% 정도였던 데 반해 현대전자의 차입금은 매출액의 110%를 넘었다. 물론 기존업체보다 후발주자의 수익성이 훨씬 높았다면 재무건전성 격차가 좁혀질 수 있었겠지만,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기존업체와 비슷한 수준의 영업수익성을 기록했다. 즉, 두 회사는 공격적인 차입경영을 통해 단기간에 생산능력을 확충하고 어느 정도 기술력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과도한 채무부담을 해소할 만큼 수익성을 제고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경제위기가 닥친 1997년, 삼성전자의 매출액 대비 차입금이 56%였던데 반해 현대전자의 매출액 대비 차입금은 153%에 이르렀다. 1996년에 반도체 경기가 급락하고 1997년 말 원화환율의 폭등으로 인해 원화로 환산한 외화차입금 부담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위기상황에 접어들고 있었다.
잘못된 처방과 빗나간 비판
1998년 초부터 현대전자와 LG반도체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으나, 유감스럽게도 논의의 초점은 재무구조의 건전성 대신 설비의 과잉 여부에 맞춰졌다. 경제위기 발생 직후의 공황적인 상황에서 설비의 과잉 여부는 수요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결과였다. 수요가 회복되면 과잉설비 문제는 해소될 것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빅딜이 과잉설비 문제의 해법으로 제시된 것은 더욱 더 이해하기 힘들다. 사업을 맞교환하거나 통합한다고 해서 설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논리싸움에서 밀리자 빅딜 옹호론자들은 빅딜을 통해 규모의 경제와 시너지 효과가 제고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빅딜은 연막이었고 빅딜 옹호론자들이 바랐던 것은 특혜성 금융지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빅딜 반대론자들 중 대다수는 현대전자와 LG반도체를 반강제적으로 통합시키는 것은 비판했지만, 두 회사를 각각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 중 일부는 '기업구조조정을 시장에 맡기라'고 주장하면서 사실상 현상유지 정책을 옹호하기도 했다. 1998년 당시 5대 재벌의 계열사에 대해서도 예외를 두지 말고 워크아웃 등을 적용하여 재무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한편 경영책임을 추궁하도록 주장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최근 일각에서는 하이닉스 문제와 관련하여 빅딜 원죄론을 제기하고 있으나, 이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빅딜에 따른 인수대금의 단기 지급으로 인해 하이닉스의 유동성 문제가 가중된 측면은 있지만, 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빅딜이 이뤄지기 훨씬 전부터 불안한 재무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빅딜은 하이닉스의 재무구조 문제를 해소하지 못했지만, 없었던 문제를 만들어냈던 것도 아니다. 1999∼2000년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감춰졌던 재무구조의 건전성 문제는 2001년 반도체 경기가 급락하면서 다시 대두하게 되었다.
하이닉스는 어디로...
2001년에 하이닉스는 전체 차입금의 80%를 갚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하이닉스는 회사채신속인수제도와 12.5억 달러 규모의 GDR 발행을 통해 유동성 문제를 해소하려고 했으나, 하이닉스의 재무구조 문제는 단순한 유동성 문제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반도체 가격이 폭락하여 2001년에 매출이 무려 55%나 감소함에 따라 채권단은 하이닉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결국 채권단은 출자전환 2.9조원, 채무면제 1.4조원, 신규자금 6500억 원 등을 포함하는 대규모 채무조정을 단행했다. 하지만, 채무조정 후에도 하이닉스의 매출액 대비 차입금은 무려 151%나 되기 때문에 하이닉스는 당장은 살아있지만 아직도 불안한 재무구조를 가지고 있다. 물론 2001년의 반도체 경기가 워낙 좋지 않아서 매출이 급감했기 때문에 매출액 대비 차입금 비율이 상승한 측면도 있지만, 하이닉스의 채무부담은 아직도 과도한 것으로 보인다. 1998년과 비교할 때 문제의 본질은 변한 것이 없다.
이제라도 채권단은 기존의 채권은 일단 제쳐두고 하이닉스의 경쟁력을 냉정하게 평가하여 하이닉스를 존속시키는 것이 나은지 청산시키는 것이 나은지 결정해야 한다. 청산시키는 것이 낫다면 설비를 뜯어 팔아 채권을 회수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하이닉스를 존속시키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된다면 반도체산업 특성상 지속적인 설비투자에 필요한 자금조달 방안도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이닉스의 미래수익을 가지고 도저히 갚을 수 없을 것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출자전환 등 채무조정이 이뤄져야 한다.
사실 이번에 채권단이 마이크론과의 매각협상에서 제시한 안은 이와 같은 채무조정의 틀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채권단은 하이닉스의 메모리반도체 사업부문을 인수하여 마이크론이 신설할 마이크론 코리아에 15억 달러의 신규자금을 설비투자용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이 신규자금에 대해서는 마이크론 본사의 지급보증이 없다. 채권단은 사실상 하이닉스 메모리반도체 부분의 미래 수익창출 능력을 믿고 돈을 추가적으로 빌려주기로 한 셈이다.
물론 마이크론이 하이닉스보다 월등히 뛰어난 기술력과 경영능력을 보유한 회사라면 현재 하이닉스 메모리반도체 부분의 경쟁력을 상당히 개선시킬 수 있겠지만, 마이크론은 BB-의 신용등급을 가지고 있는 회사로서 하이닉스와 대동소이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점에서 마이크론은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GM과 대비된다.
또, 채권단은 하이닉스의 부채 6조 7천억 원 중 3조 원을 추가로 조정하여 3조 7천억 원만을 남겨주기로 했다. 문제는 3조 7천억 원의 잔존 부채 전체를 하이닉스의 잔존 비메모리 부문에 넘기기로 한 점이다. 하이닉스의 비메모리 부문의 연간 매출액은 1조원도 되지 않는다. 메모리 부문의 자산은 부채 없이 마이크론에 매각하고 하이닉스 전체 매출액의 20% 정도밖에 되지 않는 비메모리 부문이 남은 부채를 책임지도록 한 것이다. 마이크론이 지불하는 대가는 신주 1억 860만주와 현금 2억 달러 뿐이다. 마이크론 주가 변화에 대한 리스크는 전적으로 채권단이 지도록 되어 있었다. 결국 이와 같은 조건으로 매각이 이뤄졌다면 하이닉스는 메모리 부문을 마이크론에 넘기고, 과도한 채무부담으로 생존가능성이 거의 없는 비메모리 부문을 떠안게 되었을 것이다. 하이닉스 주주의 권익을 보호해야 하는 이사회가 이와 같은 매각방안을 거부한 것은 당연하다고 판단된다.
지금이라도 채권단은 하이닉스의 재무구조 문제와 조직구조 문제를 분리하여 경제성 원칙과 손실부담 원칙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미 마이크론과의 협상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하이닉스의 존속가치가 청산가치보다 높지만 부채 전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된다면 추가적인 채무조정이 이뤄져야 한다. 신규자금에 대해서는 금융기관이 각각 얼마씩 부담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하고 하이닉스의 주주들도 증자 등을 통해 참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만약 이해관계자들간에 합의를 이룰 수 없다면 회사정리(법정관리) 절차를 통해 법원에서 해결책을 도출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임원혁 (미래전략연구원)
출처 - 미래전략연구원 2002. 5.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