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바꿔야 한다. 패거리정치, 가신정치, 족벌정치, 정실정치를 청산하지 않고는 일류(一流) 한국은 불가능하다. ‘제로섬’의 폐쇄사회에서 벗어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개방사회로의 시대 변화는 정치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한다. 2020기획팀은 미래 건설을 위한 정치개혁의 첫 번째 과제로 ‘작고 빠르며 부드럽고 열린 정치’를 제안한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 각 부문은 틀을 바꾸고 투명성·책임성·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들은 지역을 ‘분할점령’하고 쓸데없는 쟁점을 만들어 국론을 분열시키면서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 정치는 미래를 여는 ‘열쇠’가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는 ‘원천’이었다.
정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우선 정치 권력을 사유화하는 거대 조직들을 해체하고 권력기구의 실권행사 과정을 공개하자. ‘제왕적 대통령, 제왕적 총재’를 시민 곁으로 불러오고 권력을 은밀하게 보좌하는 비공식 기구와 주변조직을 과감히 없애야 한다. 그것이 권력 추종자들의 분탕질로부터 정치를 구하고 국가의 미래를 구하는 길이다.
둘째, 정치 소비자인 국민의 요구에 신속하게 응답하는 ‘서비스형 정치’를 만들자. 고객만족주의는 국가경영의 제일 원칙이다. 정치 서비스의 질을 측정하는 정치실행지표를 개발하고 매년 조사 결과를 공표하라. 셋째, ‘싸움판 정치’와 결별하고 ‘콘도미니엄(Con-Dominium:協治) 정치’의 시대를 열자. 초당적 사안은 여야 정치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는 공치(共治)기구를 가동하라.
넷째, ‘정겨운 정치’를 펼쳐라. 외교·안보·국방과 같은 딱딱한 ‘거대담론’도 중요하지만 국민들은 생활고를 덜어주고 사회에 윤기를 선사하는 ‘생활밀착형 정치’, 환경변화와 새로운 도전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연성(軟性) 정치’를 고대한다.
( 任爀伯 고려대 교수·2020기획위원 )
[미래로 가자] 고비용 저효율의 정당구조 개혁해야
‘人治’아닌 제도-시스템이 움직이는 정치를
2020년 한국정치의 그랜드 플랜(Grand Plan)을 짜자. 그 속에 담겨야 할 내용은 자명하다. 한국정치의 ‘부끄러운 과거’를 버리고 ‘희망 없는 현재’를 과감히 뛰어넘는 것이다.
‘갈등의 정치’에서 ‘포용의 정치’로, ‘조직중심 정치’에서 ‘개인스타일 정치’로, ‘인치(人治)’에서 ‘제도치(制度治)’로, ‘이념정치’에서 ‘생활정치’로 나아가야 한다. 정치는 더 이상 ‘환멸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6·29선언이 한국정치의 분수령
지난 반세기 우리 정치는 먼 길을 달려왔다.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신생 대한민국에게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우리 것’으로 소화해 뿌리내릴 역량도, 경험도 부족했다.
그 때문에 민주화 과정의 진통과 파행은 당연한 것이었다. 정치 지도자들은 스스로 선진 정치제도를 배우기보다 헌법을 뜯어고쳐서라도 정치제도를 자신에게 맞추려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열망은 대단했다. 한국 전쟁의 와중에도 선거를 치러냈고, 부정선거를 자행한 정권을 국민의 힘으로 심판했다.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치하에서 투옥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한 야당과 시민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투쟁의 결과가 1987년 민주화였다.
그로부터 15년. 이제 한국의 민주주의는 세계적으로 ‘제3의 민주화 물결’의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다. 뒤늦게 정치 민주화 대열에 합류했지만 빠른 시간 내에 민주주의를 본 궤도에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은 연속적으로 3번의 대통령 선거, 4번의 국회의원 선거, 3번의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치러냈다.
‘문민정부’는 지구상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인 한반도에서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를 확립했고, ‘국민의 정부’는 한국 정치 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어 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천년의 첫번째 대통령 선거와 지방정부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 미국의 인권단체인 프리덤하우스는 2001년 보고서에서 한국을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정치적 자유가 보장된 나라로 평가했다.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있어 다른 선택이 없는 ‘유일한 정치체제’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한국정치의 현주소―5가지 문제점
현재 정치는 국민들로부터 철저히 외면을 당하고 있다.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진 정치 시스템이다. 민주화 이후 민선 정부들은 예외 없이 임기 말 ‘국정마비’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준다. 5년 단임제 때문에 구조적으로 레임덕이 불가피하다는 지적과 ‘제왕적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된 정치구조가 필연적으로 부정부패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은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문제는 정치시스템의 작동 불능으로 인해 정치가 갈수록 국민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적과 도덕성면에서,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치 지도자가 권위주의 시대 독재자들보다 나을 게 없다는 실망과 회의가 확산되고 있다. 이런 냉소주의는 ‘정치의 희화화( 化)’를 부추기고 있다.
둘째, 국론을 통합해야 할 정치가 국론 분열의 주체가 되고 있다.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남북문제도 당파적으로 접근한다. 정치인들 사이에는 민주적 정치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립과 상호부정만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갈등해소와 이해조정이라는 정치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셋째, 책임정치가 아직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 단임제의 장점은 다음 선거에 신경 쓰지 않고 역사 앞에 책임을 지는 자세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들은 반대로 가고 있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을 뽑아준 국민에게 책임을 지면 된다. 하지만 현실은 보스에게 ‘책임지는’ 행태가 벌어지고 있다. 공천을 따내기 위해서다. 지역을 분할 지배하는 특정 정당의 공천을 받으면 당선이 보장되는 정치구도는 더 문제다. 이는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훼손하는 것이다. 정치 수요자인 유권자의 요구에 따르지 않는 정치인도 재선, 삼선이 가능하다면 책임정치는 뿌리내릴 수 없다.
넷째, 정치의 ‘고비용·저효율’ 구조다. 우리 정치는 다른 나라는 물론이고 사회 어느 부문보다도 ‘투입’에 비해 ‘산출’이 낮은 취약산업이다. 고비용의 가장 큰 원인은 중앙당 사무국이 중심이 되는 중앙집권적 피라미드형 정당 조직이다. 유지비용에 비해 생산성은 형편없다. 동원에 의존하는 세(勢)몰이식 선거운동 방식도 고비용 정치 요인이다.
반면 정치의 생산성을 높이는 장치는 거의 없다. 정치 생산성은 국회의원들이 의정활동에 전념할 때 올라간다. 하지만 의정활동은 그들의 재선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 지역주민 상가(喪家)를 한 군데라도 더 챙기는 편이 유리하다. 그런 현실에서 의원들이 국회에서 땀을 흘릴리 만무하다. 의정활동을 투명하게 평가하는 시스템, 정책 개발을 지원하는 인프라도 허약하기 짝이 없다.
마지막 문제는 유권자에게 있다. 국민은 투표라는 회초리를 들어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을 퇴출시킬 힘이 있다. 따라서 ‘저질 정치’을 택한 책임은 결국 국민의 몫이다.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치를 갖는다. 선거는 지역대항 ‘미인 선발대회’가 아니다. 실적과 능력에 관계없이 ‘자기 고장’ 사람과 정당에만 계속 표를 던지는 유권자들이 존재하는 한 정치 변혁은 요원하다. ( 任爀伯 고려대 교수· 2020기획위원 )
------------------------------------------------ ◆프리덤하우스가 본 한국 88년부터 정치적 자유국…선진국보다는 점수 낮아 ------------------------------------------------
국제 인권단체인 프리덤하우스는 매년 전 세계 194개국의 인권상황을 평가해 인권보고서와 함께 세계인권지도를 발간한다. 지난 72년부터 시작한 인권보고서 발간은 작년으로 30회를 맞았다. 인권 상황을 평가하는 기준은 ‘정치적 권리(Political Rights)’와 ‘시민적 자유(Civil Status)’. 1~7등급까지 나눠 점수를 매기며 두 항목을 평균한 등급이 낮을수록 자유민주화 정도가 앞선 것이다. 이를 보통 ‘국가자유민주화 등급(Freedom In The World Country Ratings)’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평가 첫 해인 1972년 정치·언론 자유가 없는 ‘부자유국가’(Not Free:5.5~7등급)로 분류됐다가 73년부터 ‘부분 자유국가’(Partly Free: 2.5~5.5등급)에 포함된다. 그 후 80년대 후반까지 한국 정치는 줄곧 4~6등급을 맴돌았다. 이 기간은 유신(維新)독재와 군부 쿠데타로 상징되는 ‘정치 암흑기’였다. 그러다가 한국 정치가 한 단계 ‘점프’하는 계기가 된 것은 1987년 민주화 선언. 프리덤하우스는 노태우(盧泰愚) 정부가 들어선 1988년부터 한국을 드디어 ‘자유국가’(Free:1~2.5등급)로 분류하기 시작했고,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범한 93년 이후 인권상황이 더욱 개선됐다는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한국이 ‘자유국가’에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2001년도 프리덤하우스 인권보고서를 보면 ‘자유국가’로 분류된 나라는 전체 평가 대상 194개국 중 절반에 가까운 85개국이었다. 같은 자유국가라고 해도 ‘온도차’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미국·아일랜드·오스트리아·호주·영국·핀란드처럼 ‘1등급 자유국가’와 한국을 포함해 멕시코(정치적 권리 2등급, 시민적 자유 3등급), 가나(2,2) 필리핀(2,3) 인도(2,3) 자메이카(2,2) 몽골(2,3) 같은 ‘2등급 자유국가’와는 상황이 다르다. ‘자유국가’는 정치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한편 북한은 30년째 국가자유민주화 정도가 최하 등급인 7등급을 기록, 중국·리비아·파키스탄·르완다·시리아 등과 함께 대표적인 ‘부자유국가’로 분류돼 있다.
( 李濬기자 junlee@chosun.com )
[미래로 가자] 국제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가 본 한국
88년부터 정치적 자유국…선진국보다는 점수 낮아
국제 인권단체인 프리덤하우스는 매년 전 세계 194개국의 인권상황을 평가해 인권보고서와 함께 세계인권지도를 발간한다. 지난 72년부터 시작한 인권보고서 발간은 작년으로 30회를 맞았다. 인권 상황을 평가하는 기준은 ‘정치적 권리(Political Rights)’와 ‘시민적 자유(Civil Status)’. 1~7등급까지 나눠 점수를 매기며 두 항목을 평균한 등급이 낮을수록 자유민주화 정도가 앞선 것이다. 이를 보통 ‘국가자유민주화 등급(Freedom In The World Country Ratings)’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평가 첫 해인 1972년 정치·언론 자유가 없는 ‘부자유국가’(Not Free:5.5~7등급)로 분류됐다가 73년부터 ‘부분 자유국가’(Partly Free: 2.5~5.5등급)에 포함된다. 그 후 80년대 후반까지 한국 정치는 줄곧 4~6등급을 맴돌았다. 이 기간은 유신(維新)독재와 군부 쿠데타로 상징되는 ‘정치 암흑기’였다. 그러다가 한국 정치가 한 단계 ‘점프’하는 계기가 된 것은 1987년 민주화 선언. 프리덤하우스는 노태우(盧泰愚) 정부가 들어선 1988년부터 한국을 드디어 ‘자유국가’(Free:1~2.5등급)로 분류하기 시작했고,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범한 93년 이후 인권상황이 더욱 개선됐다는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한국이 ‘자유국가’에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2001년도 프리덤하우스 인권보고서를 보면 ‘자유국가’로 분류된 나라는 전체 평가 대상 194개국 중 절반에 가까운 85개국이었다. 같은 자유국가라고 해도 ‘온도차’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미국·아일랜드·오스트리아·호주·영국·핀란드처럼 ‘1등급 자유국가’와 한국을 포함해 멕시코(정치적 권리 2등급, 시민적 자유 3등급), 가나(2,2) 필리핀(2,3) 인도(2,3) 자메이카(2,2) 몽골(2,3) 같은 ‘2등급 자유국가’와는 상황이 다르다. ‘자유국가’는 정치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한편 북한은 30년째 국가자유민주화 정도가 최하 등급인 7등급을 기록, 중국·리비아·파키스탄·르완다·시리아 등과 함께 대표적인 ‘부자유국가’로 분류돼 있다.
[2020 미래로 가자] 고객만족 서비스 정치를
정치권력 사유화하는 거대조직 없애야
정치를 바꿔야 한다. 패거리정치, 가신정치, 족벌정치, 정실정치를 청산하지 않고는 일류(一流) 한국은 불가능하다. ‘제로섬’의 폐쇄사회에서 벗어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개방사회로의 시대 변화는 정치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한다. 2020기획팀은 미래 건설을 위한 정치개혁의 첫 번째 과제로 ‘작고 빠르며 부드럽고 열린 정치’를 제안한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 각 부문은 틀을 바꾸고 투명성·책임성·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들은 지역을 ‘분할점령’하고 쓸데없는 쟁점을 만들어 국론을 분열시키면서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 정치는 미래를 여는 ‘열쇠’가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는 ‘원천’이었다.
정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우선 정치 권력을 사유화하는 거대 조직들을 해체하고 권력기구의 실권행사 과정을 공개하자. ‘제왕적 대통령, 제왕적 총재’를 시민 곁으로 불러오고 권력을 은밀하게 보좌하는 비공식 기구와 주변조직을 과감히 없애야 한다. 그것이 권력 추종자들의 분탕질로부터 정치를 구하고 국가의 미래를 구하는 길이다.
둘째, 정치 소비자인 국민의 요구에 신속하게 응답하는 ‘서비스형 정치’를 만들자. 고객만족주의는 국가경영의 제일 원칙이다. 정치 서비스의 질을 측정하는 정치실행지표를 개발하고 매년 조사 결과를 공표하라. 셋째, ‘싸움판 정치’와 결별하고 ‘콘도미니엄(Con-Dominium:協治) 정치’의 시대를 열자. 초당적 사안은 여야 정치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는 공치(共治)기구를 가동하라.
넷째, ‘정겨운 정치’를 펼쳐라. 외교·안보·국방과 같은 딱딱한 ‘거대담론’도 중요하지만 국민들은 생활고를 덜어주고 사회에 윤기를 선사하는 ‘생활밀착형 정치’, 환경변화와 새로운 도전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연성(軟性) 정치’를 고대한다.
( 任爀伯 고려대 교수·2020기획위원 )
[미래로 가자] 고비용 저효율의 정당구조 개혁해야
‘人治’아닌 제도-시스템이 움직이는 정치를
2020년 한국정치의 그랜드 플랜(Grand Plan)을 짜자. 그 속에 담겨야 할 내용은 자명하다. 한국정치의 ‘부끄러운 과거’를 버리고 ‘희망 없는 현재’를 과감히 뛰어넘는 것이다.
‘갈등의 정치’에서 ‘포용의 정치’로, ‘조직중심 정치’에서 ‘개인스타일 정치’로, ‘인치(人治)’에서 ‘제도치(制度治)’로, ‘이념정치’에서 ‘생활정치’로 나아가야 한다. 정치는 더 이상 ‘환멸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6·29선언이 한국정치의 분수령
지난 반세기 우리 정치는 먼 길을 달려왔다.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신생 대한민국에게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우리 것’으로 소화해 뿌리내릴 역량도, 경험도 부족했다.
그 때문에 민주화 과정의 진통과 파행은 당연한 것이었다. 정치 지도자들은 스스로 선진 정치제도를 배우기보다 헌법을 뜯어고쳐서라도 정치제도를 자신에게 맞추려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열망은 대단했다. 한국 전쟁의 와중에도 선거를 치러냈고, 부정선거를 자행한 정권을 국민의 힘으로 심판했다. 서슬 퍼런 군부 독재 치하에서 투옥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한 야당과 시민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투쟁의 결과가 1987년 민주화였다.
그로부터 15년. 이제 한국의 민주주의는 세계적으로 ‘제3의 민주화 물결’의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다. 뒤늦게 정치 민주화 대열에 합류했지만 빠른 시간 내에 민주주의를 본 궤도에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은 연속적으로 3번의 대통령 선거, 4번의 국회의원 선거, 3번의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치러냈다.
‘문민정부’는 지구상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인 한반도에서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를 확립했고, ‘국민의 정부’는 한국 정치 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어 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천년의 첫번째 대통령 선거와 지방정부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 미국의 인권단체인 프리덤하우스는 2001년 보고서에서 한국을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정치적 자유가 보장된 나라로 평가했다.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있어 다른 선택이 없는 ‘유일한 정치체제’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한국정치의 현주소―5가지 문제점
현재 정치는 국민들로부터 철저히 외면을 당하고 있다.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진 정치 시스템이다. 민주화 이후 민선 정부들은 예외 없이 임기 말 ‘국정마비’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준다. 5년 단임제 때문에 구조적으로 레임덕이 불가피하다는 지적과 ‘제왕적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된 정치구조가 필연적으로 부정부패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은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문제는 정치시스템의 작동 불능으로 인해 정치가 갈수록 국민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적과 도덕성면에서,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치 지도자가 권위주의 시대 독재자들보다 나을 게 없다는 실망과 회의가 확산되고 있다. 이런 냉소주의는 ‘정치의 희화화( 化)’를 부추기고 있다.
둘째, 국론을 통합해야 할 정치가 국론 분열의 주체가 되고 있다.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남북문제도 당파적으로 접근한다. 정치인들 사이에는 민주적 정치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립과 상호부정만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갈등해소와 이해조정이라는 정치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셋째, 책임정치가 아직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 단임제의 장점은 다음 선거에 신경 쓰지 않고 역사 앞에 책임을 지는 자세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들은 반대로 가고 있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을 뽑아준 국민에게 책임을 지면 된다. 하지만 현실은 보스에게 ‘책임지는’ 행태가 벌어지고 있다. 공천을 따내기 위해서다. 지역을 분할 지배하는 특정 정당의 공천을 받으면 당선이 보장되는 정치구도는 더 문제다. 이는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훼손하는 것이다. 정치 수요자인 유권자의 요구에 따르지 않는 정치인도 재선, 삼선이 가능하다면 책임정치는 뿌리내릴 수 없다.
넷째, 정치의 ‘고비용·저효율’ 구조다. 우리 정치는 다른 나라는 물론이고 사회 어느 부문보다도 ‘투입’에 비해 ‘산출’이 낮은 취약산업이다. 고비용의 가장 큰 원인은 중앙당 사무국이 중심이 되는 중앙집권적 피라미드형 정당 조직이다. 유지비용에 비해 생산성은 형편없다. 동원에 의존하는 세(勢)몰이식 선거운동 방식도 고비용 정치 요인이다.
반면 정치의 생산성을 높이는 장치는 거의 없다. 정치 생산성은 국회의원들이 의정활동에 전념할 때 올라간다. 하지만 의정활동은 그들의 재선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 지역주민 상가(喪家)를 한 군데라도 더 챙기는 편이 유리하다. 그런 현실에서 의원들이 국회에서 땀을 흘릴리 만무하다. 의정활동을 투명하게 평가하는 시스템, 정책 개발을 지원하는 인프라도 허약하기 짝이 없다.
마지막 문제는 유권자에게 있다. 국민은 투표라는 회초리를 들어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을 퇴출시킬 힘이 있다. 따라서 ‘저질 정치’을 택한 책임은 결국 국민의 몫이다.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치를 갖는다. 선거는 지역대항 ‘미인 선발대회’가 아니다. 실적과 능력에 관계없이 ‘자기 고장’ 사람과 정당에만 계속 표를 던지는 유권자들이 존재하는 한 정치 변혁은 요원하다. ( 任爀伯 고려대 교수· 2020기획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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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덤하우스가 본 한국
88년부터 정치적 자유국…선진국보다는 점수 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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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인권단체인 프리덤하우스는 매년 전 세계 194개국의 인권상황을 평가해 인권보고서와 함께 세계인권지도를 발간한다. 지난 72년부터 시작한 인권보고서 발간은 작년으로 30회를 맞았다. 인권 상황을 평가하는 기준은 ‘정치적 권리(Political Rights)’와 ‘시민적 자유(Civil Status)’. 1~7등급까지 나눠 점수를 매기며 두 항목을 평균한 등급이 낮을수록 자유민주화 정도가 앞선 것이다. 이를 보통 ‘국가자유민주화 등급(Freedom In The World Country Ratings)’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평가 첫 해인 1972년 정치·언론 자유가 없는 ‘부자유국가’(Not Free:5.5~7등급)로 분류됐다가 73년부터 ‘부분 자유국가’(Partly Free: 2.5~5.5등급)에 포함된다. 그 후 80년대 후반까지 한국 정치는 줄곧 4~6등급을 맴돌았다. 이 기간은 유신(維新)독재와 군부 쿠데타로 상징되는 ‘정치 암흑기’였다. 그러다가 한국 정치가 한 단계 ‘점프’하는 계기가 된 것은 1987년 민주화 선언. 프리덤하우스는 노태우(盧泰愚) 정부가 들어선 1988년부터 한국을 드디어 ‘자유국가’(Free:1~2.5등급)로 분류하기 시작했고,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범한 93년 이후 인권상황이 더욱 개선됐다는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한국이 ‘자유국가’에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2001년도 프리덤하우스 인권보고서를 보면 ‘자유국가’로 분류된 나라는 전체 평가 대상 194개국 중 절반에 가까운 85개국이었다. 같은 자유국가라고 해도 ‘온도차’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미국·아일랜드·오스트리아·호주·영국·핀란드처럼 ‘1등급 자유국가’와 한국을 포함해 멕시코(정치적 권리 2등급, 시민적 자유 3등급), 가나(2,2) 필리핀(2,3) 인도(2,3) 자메이카(2,2) 몽골(2,3) 같은 ‘2등급 자유국가’와는 상황이 다르다. ‘자유국가’는 정치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한편 북한은 30년째 국가자유민주화 정도가 최하 등급인 7등급을 기록, 중국·리비아·파키스탄·르완다·시리아 등과 함께 대표적인 ‘부자유국가’로 분류돼 있다.
( 李濬기자 junlee@chosun.com )
[미래로 가자] 국제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가 본 한국
88년부터 정치적 자유국…선진국보다는 점수 낮아
국제 인권단체인 프리덤하우스는 매년 전 세계 194개국의 인권상황을 평가해 인권보고서와 함께 세계인권지도를 발간한다. 지난 72년부터 시작한 인권보고서 발간은 작년으로 30회를 맞았다. 인권 상황을 평가하는 기준은 ‘정치적 권리(Political Rights)’와 ‘시민적 자유(Civil Status)’. 1~7등급까지 나눠 점수를 매기며 두 항목을 평균한 등급이 낮을수록 자유민주화 정도가 앞선 것이다. 이를 보통 ‘국가자유민주화 등급(Freedom In The World Country Ratings)’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평가 첫 해인 1972년 정치·언론 자유가 없는 ‘부자유국가’(Not Free:5.5~7등급)로 분류됐다가 73년부터 ‘부분 자유국가’(Partly Free: 2.5~5.5등급)에 포함된다. 그 후 80년대 후반까지 한국 정치는 줄곧 4~6등급을 맴돌았다. 이 기간은 유신(維新)독재와 군부 쿠데타로 상징되는 ‘정치 암흑기’였다. 그러다가 한국 정치가 한 단계 ‘점프’하는 계기가 된 것은 1987년 민주화 선언. 프리덤하우스는 노태우(盧泰愚) 정부가 들어선 1988년부터 한국을 드디어 ‘자유국가’(Free:1~2.5등급)로 분류하기 시작했고,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범한 93년 이후 인권상황이 더욱 개선됐다는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한국이 ‘자유국가’에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2001년도 프리덤하우스 인권보고서를 보면 ‘자유국가’로 분류된 나라는 전체 평가 대상 194개국 중 절반에 가까운 85개국이었다. 같은 자유국가라고 해도 ‘온도차’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미국·아일랜드·오스트리아·호주·영국·핀란드처럼 ‘1등급 자유국가’와 한국을 포함해 멕시코(정치적 권리 2등급, 시민적 자유 3등급), 가나(2,2) 필리핀(2,3) 인도(2,3) 자메이카(2,2) 몽골(2,3) 같은 ‘2등급 자유국가’와는 상황이 다르다. ‘자유국가’는 정치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한편 북한은 30년째 국가자유민주화 정도가 최하 등급인 7등급을 기록, 중국·리비아·파키스탄·르완다·시리아 등과 함께 대표적인 ‘부자유국가’로 분류돼 있다.
( 李濬기자 junlee@chosun.com )
출처 - 조선일보 2002. 4. 29
* 위 글의 내용은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의 공식적인 견해와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