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정책, 시장에 맡겨라
	2005-03-28
미디어 정책, 시장에 맡겨라 1997년 여름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 연방통신위원회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동행했던 국내 통신회사 간부가 통신사업 허가를 맡고 있는 담당자에게 말을 건넸다. "대한민국에는 현재 두 개의 휴대전화 사업자가 있다. 정부에서 추가로 세 개의 휴대전화 사업자를 허가하려 한다. 시장에서 모든 사업자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 담당자는 빙긋 웃었다. "우리 부서는 지난달에 노스다코타주에 12개의 이동통신 사업 면허를 허가했다. 가장 적절한 사업자는 소비자가 선택할 것이다." 다코타주라면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늑대와 춤을'의 촬영 무대가 아닌가. 그 많은 들소 떼가 뛰어다니던 곳에 10개가 넘는 이동통신 사업자 면허를 발부하다니 언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시장 원리에 따르는 정책 결정의 예였다. 소비자들에게 궁극적인 선택의 기회를 준 것이다. 정부는 정책의 큰 틀을 정할 뿐 시장 안에서의 시행착오는 사업자의 책임이며, 소비자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업자는 도태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이에 비해 우리 정부는 미디어 정책에서 너무 강한 책임의식의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듯하다. 케이블TV.위성방송.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도입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미디어가 시장에 도입될 때마다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 등이 수많은 미디어 정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각종 정책은 시장에서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불렀다. 케이블TV의 인위적인 삼분할 정책은 규모의 경제를 간과함으로써 초기 케이블TV 산업 발전의 발목을 잡았다. 수용자 선택을 무시한 위성방송의 지상파 재송신 정책은 결국 위성방송 확산에 치명타를 입혔다. 최근 이 문제는 90% 이상 중복되는 지역방송 신호들을 연간 수십억원을 들여 전국으로 전송하는 코미디 같은 타협책을 찾았지만 사업자는 이미 기진맥진해 있다. 모든 문제를 정부가 풀겠다는 엘리트 발상이 부른 실패 사례들이다. 정보통신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것이 지배하는 미디어 시장의 모든 부분을 정부가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한 발상 자체가 시장을 멍들게 하는 왜곡된 결과를 낳는다. 정부는 수용자 복지를 미디어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사업자들이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안에서 사업자들이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면, 수용자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알맞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자의 선택을 불안하게 여기고 못 미더워하는 계몽주의적 태도는 바뀌어야 한다. 미디어 산업에서 정책 당국의 힘은 막강하다. 정부는 어느 정도 탈규제 정책 기조를 도입했다고 하지만 무늬만 시장 원리를 존중하는 격이다. 지상파 방송 정책에서는 공공적 가치를 유지하고 뉴미디어 부문에서는 산업성을 부각시키는 일관된 정책 기조가 필요하다. 디지털 기술 발전의 도도한 파도 앞에서 방송.통신영역을 구분 짓던 경계선은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다. 미디어 시장에는 지금까지 정책으로는 규제할 수 없는 융합적 성격을 띠는 서비스들이 속속 도입되고 있다. 정부는 규제기관 간의 영역 다툼에서 벗어나 융합 환경을 반영한 미디어 정책의 큰 틀을 하루빨리 제시해야 한다. 공정한 경쟁의 틀 안에서 미디어 산업이 마음껏 춤출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는 역할이야말로 정부의 몫이다. 공정한 경쟁의 마당이 조성된다면 시장 실패를 무조건 정부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미디어 정책의 최우선 목표는 사업자의 이윤 추구도, 규제기관의 영향력 확대도 아닌 수용자의 복지 향상이다. 수용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시장 원리의 기초다. 도준호 (숙명여대 교수.언론정보학) 출처 - 중앙일보 2005. 3. 26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