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원수와 외교의 본질
	2005-03-25
국가원수와 외교의 본질 뚝배기보다 장맛이라 했던가. 최근 들어 노무현 대통령이 행한 일련의 안보외교적 발언이 이 같은 우리의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 2월 말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밝힌 ‘동북아균형자’론에 이어 23일에는 청와대 홈페이지에 실린 ‘온라인’ 대국민 서신이 국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대통령의 ‘한·일관계 관련 국민에게 드리는 글’은 “역대 양국 관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초강경 발언”이라는 일본 외무성의 반응과 함께 일부 외신들도 한국이 일본에 전면적인 외교전쟁을 선포했다고 보도할 정도이다. 필자를 포함한 우리 국민 대다수는 노 대통령의 발언 취지에 대체로 찬동하고 공감한다고 생각되지만 북핵사태 등 민감한 시기에 굳이 대통령이 나서서 대립각을 세우는 단호한 입장 표명을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겠는지에 대해서는 다수의 회의적 시각이 동시에 있는 것 같다. 즉, 내용물도 중요하지만 어떠한 계제에 어떤 포장과 용기(容器)에 담느냐 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이른다. 우선 ‘동북아균형자’ 역할론만 해도 그렇다. 노 대통령 발언의 취지는 최근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을 위요한 미·일의 동맹강화 움직임 등으로 역내의 패권(hegemony) 다툼이 노골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국익 수호를 위해 보다 신축적인 외교 자세를 취하겠다는 것인데, 여기서 ‘균형자(balancer)’라는 말은 국제관계 이론상으로도 적합한 용어가 아니다. 원래 ‘균형자’라는 말은 18~19세기 영국의 유럽대륙국 정책의 하나로 현상유지 정책이라고도 불리는데, 독일계의 합스부르크(Habsburg)가와 프랑스계의 부르봉(Bourbon)가의 세력 다툼 사이에서 힘이 약한 쪽을 지원하는 정책을 취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 후 나폴레옹전쟁 때는 영국이 5국체제의 현상유지를 택함으로써 프랑스를 존립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한국은 국제법상 미국의 동맹국이기 때문에 원초적으로 ‘균형자’의 자격이 없으며 대통령의 발언 취지에 충실한다면 ‘완충역할(buffer zone)’이나 ‘비스마르크’식 ‘정직한 중재자(honest broker)’가 더 적절한 용어이다. 완충 역할이나 중재자 역할은 동맹 여부에 관계없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외교학의 고전인 ‘외교론’의 저자 해럴드 니컬슨 경은 “외교는 협상을 통해 국제관계를 관리·해결해 나가는 것”이라면서 이를 ‘기술’ 내지 ‘예술(art)’로 간주했다. 같은 맥락에서 실제로 외교가에서 나도는 격언 중에 외교관의 완곡한 간접화법을 혼기를 앞둔 처녀가 남자를 대하는 태도에 빗대어 지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처녀는 ‘예스(Yes)’를 말하지 않으며, 외교관은 ‘노(No)’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녀가 함부로 ‘예스’를 하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외교관이 ‘노’를 말하는 것은 상대국에 ‘비례’를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외교관이 ‘노’라고 응답할 상황에서는 ‘may be’를 씀). 사정이 이럴진대 외교전사인 일본 현지의 한국 대사도 아니고 본국의 외교장관도 아닌,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진두지휘하는 외교전은 현재의 국내외 여건상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대통령의 온라인 담화문에서도 우리 국민이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끈기와 인내심을 가지고 대처해 나가자는 당부 말씀이 있기는 하지만, 기실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는 부분은 단호하고 강경한 어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예쁜 포장이나 용기는 공산품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외교·안보의 메시지에도 비유적으로 해당됨을 깨닫게 된다. 물론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한국 국내용’이라고 한 말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김경수 (명지대 교수·국제정치학) 출처 - 문화일보 2005. 3. 25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