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 정파성 청산부터
	2005-02-23
한국 언론, 정파성 청산부터 공론 형성 메커니즘 왜곡 '사실의 창고'로 거듭나야 대통령이 정부 여당 사람들을 모아놓고 국정토론회라는 걸 가끔 하던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한 신문사에서 전화가 왔다. 기자는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 아젠다가 언론문제밖에 없는지 국정토론회에서 언론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았다”며 이에 대한 논평을 요구했다. 나는 정부와 언론의 싸움에 짜증을 느끼고 있던 터라 “남의 말만 할 게 아니라 언론도 아젠다가 그렇게 없어요? 그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아요.”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다음 날 신문에 그 기자는 자기가 내게 한 말을 마치 내가 한 말인냥 기사를 썼다. 우리 언론이 공론 형성의 매카니즘을 얼마나 왜곡하는지 새삼 깨닫게 한 경험이었다. < 언론이 왜곡하는 공론 형성 과정>두루 아는 바이지만, 밀턴은 사상의 공개시장에서 진리와 거짓이 서로 맞붙으면 자동조절과정을 거쳐 언제나 진리가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진리가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 어떤 술책도 허가도 필요치 않다고 주장했다. 언론의 자유를 완벽하게 보장하는 것이 진리가 이기게 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밀턴의 이런 낙관론은 자유주의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가정이 된지 오래다. 그러나 언론이 대기업으로 탈바꿈한 뒤 언론의 자유에 대한 그런 낙관론은 점차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하버마스는 신문이 중심이 되어 형성한 공론장(public sphere)이 서구에 민주주의를 가져다준 점을 평가하면서도, 이제 대중매체가 상업화하고 나아가 거대조직으로 탈바꿈하여 사회적 권력복합체가 됨으로써 여론형성 과정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대중매체가 자체의 이해관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더구나 다양한 세력이 대중매체를 대상으로 홍보활동을 벌여, 부르주아 공론장이 다시금 봉건적 특성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공론의 형성과정이 대중매체에 의해 뒤틀리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선진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주요 매체가 특정 정치세력과 대립관계를 견지하거나 아니면 상조관계를 이루며 거의 상시적으로 정파성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는 해당 매체의 신뢰도나 영향력을 떨어뜨리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런 행위는 곧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 자체를 파괴하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우리 언론이 고질적인 정파성을 극복하지 않는 한 미래는 없다. 정파성을 지양하기 위해 이 시점에서 언론이 해야 할 과제는 보도원칙의 고전을 되새김하는 일이다. 언론은 무엇보다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 독자들이 언론에 바라는 바는 수사관이 피의자에게 다그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한다. 사실을 말하라는 게 그것이다. 막스 베버는 미국 언론을 ‘사실의 창고’라고 일컬은 바 있다. 그는 미국 언론이 사실 자체를 신앙처럼 추구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가꾸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언론은 사실보도, 판단은 독자의 몫>아주 원론적인 얘기지만, 그 사실주의는 균형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야 한다. 명저《뉴스의 역사》를 쓴 스티븐스는 “기자들은 어떤 의견과 그 의견에 반대되는 내용을 묶어 그들 의견끼리 서로 경쟁하여 진실에 도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기자는 다양한 정보를 균형 있게 제공하고 판단은 독자가 내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루빈은 미국의 현대 언론이 언론비평가들로부터 공격받는 여섯 가지 항목을 적시한 바 있다. 선정성, 언론의 소유권 독점, 프라이버시 침해, 광고주의 통제, 노동조합에 대한 적대감, 통신의 독점체제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정파성은 들어있지 않다. 우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미국 언론이 지난 세기에 이룬 가장 위대한 업적은 정파성을 청산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언론도 정파성을 떨쳐버리고 사실의 창고로 거듭나야 한다. 김민환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다산연구소 제공) 출처 - 한국일보 2005. 2. 23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