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절차 무시한 '언론이사장 임명'
	2004-12-29
민주절차 무시한 '언론이사장 임명' 정말 볼썽사나운 일이었다. 내정자가 있었고, 원치 않는 인물이 강력한 후보였다면, 차라리 각본을 치밀하게 짜서 처리했을 일이지, 민주적 절차를 밟는 체하다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 이사들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선임한 이사장을 문화관광부가 임명하지 않겠다고 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언론재단 이사장 선임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래저래 연말에 또 하나의 ‘허무개그’가 연출되고 말았다. 이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동료 국회의원을 ‘물어뜯겠다’거나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탄핵’하겠다고 하는 것들과 동일선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절차적 합리성은 그냥 하는 말이고, 생각대로 의도대로 안 되면 추기경이고 사회원로고 헌법재판관이고 눈에 안 보이며, 떼거리로 들고 일어나 막말을 해대는 사람들이 설치는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은 그럴 듯한 명분이나 논리로 잘 포장해서 밀어붙이기라도 했는데, 그런 능숙한 일 처리 솜씨도,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좌충우돌하는, 어설픈 ‘아마추어’들의 공연장을 보는 것 같다. 아마추어라는 단어를 여기에 붙이는 것 자체가 어쩌면 진정한 ‘아마추어’들에 대한 모독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마추어리즘’의 가치는 순수함에 있다. 얼마 전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프랑스혁명을 세계혁명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면 파리 시민들이 세운 시민자치정부인 ‘파리코뮌’이 자유와 평등을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혁명에 동참한 시민들의 순수함에 있었다. 빵 가게, 꽃 가게, 식료품 가게를 경영하는 이른바 ‘프티(小) 부르주아’들이 파리코뮌을 세웠는데, 이들이야말로 정치의 아마추어들이었다. 이들 코뮌 혁명가들이 프랑스국립은행 금고를 ‘털어’ 혁명자금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 파리코뮌의 실패의 한 원인이라고 카를 막스는 지적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묻지 않은 순수함, 우리로 치면 한국은행인 프랑스국립은행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순수함’ 때문에 파리코뮌이 혁명을 동경하는 정치적 이상주의자들의 가슴에 영원히 자리잡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통령 노무현은 정치의 ‘아마추어’였다. ‘프로’ 정치인들의 정경유착이 한국 정치문화를 지배하고 있었던 시대에, 거대 재벌 회장의 청문회장에서 ‘굽실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질문 공세를 펼쳤던 그였다. 지역구도가 당선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적대적’ 정당의 백넘버를 달고 부산으로 달려간 그는 분명 한국 정치의 ‘이단아’였다. 그러나 국민들은 한번도 모자라 두 번씩이나 달려간 ‘노무현 선수’에게서 순수한 정치적 열정을 읽었던 것이다. 능구렁이 구시대 정치인들과는 다른 ‘소년’같은 그에게서 희망의 빛줄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발투수’로서 교체 위기에 있었던 그를 ‘구원’해 주었던 것도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노무현 집권 2년은 초기 ‘순수한’ 이미지의 변질화 시기인가, 아니면 애초부터 가장된 이미지였던가? 초등학교에서도 민주적 절차는 존중된다. 반장 선거에서 반장이 ‘연임’ 선출됐는데 담임 선생님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치자.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더욱이 민주주의 국가 체제에서 절차의 합리성이 담보돼야 함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목표 달성에만 치중하게 되면 자칫 법이니 절차 같은 것은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이번 한국언론재단 이사장 임명 거부 건은 목적 지상주의의 결과이다. 민주적 절차를 우선으로 두고, ‘싫어도’ 안고 가는 것을 기대하는 것조차 너무 사치스러운 생각일지 모르겠다. 이관열 (강원대 신문방송학 교수) 출처 - 문화일보 2004. 12. 29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