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키 맞추는’ 언론정책
	2004-12-06
‘침대에 키 맞추는’ 언론정책 고대 그리스 이야기다. 프로크루스테스가 길가에 여인숙을 차렸다. 길 가는 사람들을 환대한 후 자기가 만든 침대로 유인한다. 침대에 투숙객을 눕혀 놓고,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잡아당겨 늘이고, 침대보다 길면 다리를 잘랐다. 다른 사람을 나의 생각에 맞추는 것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식이라고 한다. 전혀 이치에 맞지 않은 논리를 억지로 두들겨 맞출 때 사용하는 은유다. 허무맹랑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은 일이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 한 곳이 언론이다. 가장 많이 읽히는 조선·동아·중앙 세 신문을 ‘죽이기로’ 정해 놓고 갖가지 논리를 갖다 붙였다. 족벌 신문 논리가 그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여론이 동조해 주지 않으니까 법 논리로 해결하기로 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법전을 뒤졌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찾았다 싶어 환호를 터트렸는데, 잘못 가져 온 법임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조·중·동 ‘족치기’는 이미 결정한 일이기 때문에 이치에 맞든, 안 맞든 개의하지 않고 일을 벌이고 있다. 프로크루스테스 식이다. 사전에 각본을 정해 놓고 하는 일이 방송에도 벌어지고 있다. SBS 재허가 문제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SBS가 ‘미운 오리 새끼’가 된 것 같다. 지난 봄 탄핵 보도를 ‘공정’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은 차라리 사실로 믿고 싶지 않다. 족벌 방송이라서 뺏어야 한다는 무지막지한 논리를 폈다. 그런 논리라면 세계의 민영 방송은 거의 족벌 방송이다. 방송위원회가 SBS에 대해 이미 재추천에 해당하는 평가 점수를 주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계속 물고 늘어지고 있다.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야 자신들의 ‘침대’에 맞출 수 있는 논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이 지난 주 영국을 방문했다. 국빈방문이라는 드문 대우를 받고 영국 여왕을 만났다. 여왕과 만찬을 하고, 마차를 같이 타고 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영국의 신문 역사를 떠올렸다. 영국은 세계 대제국이었지만, 언론의 나라이다. 1534년 헨리8세 영국 국왕은 신문허가법을 만들었으나, 의회는 1679년 신문 허가법을 폐기했다. 그 뒤론 국가 전복이나 반란을 꾀하지 않는 한 신문은 어떤 제재도 받지 않는다. 17세기부터 보장된 자유 언론과 영국의 세계 제국 건설과는 분명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모델 국가가 된 것도 자유로운 언론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는 영어로 프리덤 오브 프레스이다. 프레스는 인쇄기를 말한다. 언론의 자유는 즉, 인쇄기를 소유하고, 출판하는 자유이다. 영국의 신문사들은 가족이 대대로 경영한다. 이른바 ‘족벌 신문’인 것이다. 영국만이 아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두 신문인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족벌 신문’이다. 세계 최대 언론 재벌 머독은 영국에서 6개 일간지를 소유하고 있다. 최고의 권위지 더 타임스가 대표적이다. 그는 호주에도 20여개의 신문을 갖고 있다. 그의 아버지도 신문 소유주였다. 대표적인 ‘족벌 언론’이다. 신문만이 아니다. 방송도 수 없이 갖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나라에서도 머독의 신문 방송을 규제한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족벌 신문, 족벌 방송이라는 어휘는 우리나라에만 있다. 어떻게 조선·동아가 ‘족벌 신문’이니까 규제한다는 생각을 했을까?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치기로’ 정해 놓고 구실을 찾다 보니 잘못된 지식의 진위를 가릴 틈도 없게 마련이다. 다시 그리스 신화로 돌아가자. 영웅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머리를 잘라 죽였다. 테세우스가 아니었다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더 죽었을 것이다. 언제 우리나라에서도 프로크루스테스 침대 같은 일들이 멈출까? 이관열 (강원대 신문방송학 교수) 출처 - 문화일보 2004. 12. 6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