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없는 시민혁명
	2004-10-21
시민 없는 시민혁명 강의하다 보면 종종 샛길로 빠지는 때가 있게 마련이다. 얼마 전에는 어떤 책 한 대목을 들려준 적이 있는데 이런 얘기다.'1960년대 초 아프리카 가나와 한국의 경제 데이터를 보면 일인당 국민 소득, 산업구조, 일차산업 생산물 위주의 수출 등에서 아주 유사했고 또 비슷한 수준의 경제원조를 받았다. 30년 후 한국은 세계 14대 규모의 산업대국이 됐고 그리스와 맞먹는 국민소득에 이르렀다. 가나에서는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일인당 소득은 한국의 15분의 1에 불과하다. 기존 보안법보다 못한 법안 이 같은 엄청난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 설명의 상당 부분은 문화, 곧 가치관이 차지한다. 한국은 근검.투자.근면.교육.조직.기율을 가치있는 것으로 보았다. 가나는 다른 가치관을 가졌다. 요컨대 문화가 중요하다'(해리슨, 헌팅턴 공편, '문화가 중요하다', 2000, 헌팅턴의 서문 첫머리). 조금은 심각하게 이런 내용을 말하는 도중, 학생들로부터 뜻밖의 반응이 나왔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왜 웃느냐고 물었지만 그저 빙그레, 대답이 없다. 지금도 나는 그 웃음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경제가 어렵고 살기 힘들다는 원성이 도처에 가득하다. 경제난을 둘러싼 여러 논의에서 한결같이 지적되는 점은 경제를 살릴 분위기가 안 돼 있다는 것이다. 그렇건만 집권당은 아랑곳없다는 듯, '개혁입법'으로 세상을 들쑤셔놓고 있다. 그것도 한두 법안이 아니다. 혁명이나 쿠데타가 아니라면 생각하기 힘들 법한 법안들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내놓은 국가보안법 폐지, 형법보완안이 국회에 상정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심사는 착잡하다. 보안법이 어디 예사 법인가. 한 나라의 근본 체제에 관련된 것이고, 형식은 법률의 하나지만 실질적으로는 헌법에 해당하는 법이다. 이런 법의 근간을 바꾸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그에 상당한 신중한 과정과 국민적 합의가 밑받침돼야 한다. 헌법 개정에 버금가는 토론과정과 국민적 동의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절대다수의 여론이 반대하는 법안을 쫓기듯 내놓고 있다. 무엇이 그리 급한가. 법안 내용을 보면 그 허겁지겁한 과정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내보이고 있다. 북한의 간첩을 처벌할 수 있는지 여부조차 불투명한 수수께끼 같은 규정이다. 처벌 대상의 명확성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기존의 보안법보다 훨씬 못한 수준이다. 이런 법안을 그대로 입법화한다면 무엇은 해도 되고 무엇은 안 되는지 잠재적 친북 행위자들에게 세세한 지침서라도 만들어 줘야 할 판이다. 한편 '친북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광범하게 보장하려는 것과는 달리 집권당의 '언론 개혁'법안들은 언론 자유에 대한 또 다른 잣대를 내세우고 있다. 특별히 시장점유율이 높은 신문들을 규제대상으로 삼겠다는 발상은 차라리 대담하다고 봐야 할 것인가. 만일 '주류신문'들이 집권 측과 '코드'가 맞는 신문들이었다고 해도 이런 법안이 나왔을까를 생각하면 그 본뜻이 어디 있는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겉으로만 보더라도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가 '약한 언론'만의 자유가 아닐진대 이런 규정은 위헌 판단을 면키 어렵다. 지금 언론 개혁이 필요하다면 우선 공영방송의 편향성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고, 인터넷 매체의 막가는 난잡한 상황을 바로잡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법안들은 도리어 거꾸로 가는 형국이니 이를 어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그뿐만 아니다. 시민혁명의 실체가 이런 건가 다수 반대를 무릅쓴 수도 이전 계획, 강제조사권을 담은 과거사 규명 법안 등, 집권 측이 서둘러 해내려는 다른 일들도 이해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국민적 공감 없이 밀어붙이려는 까닭이 무엇인가. 언젠가 대통령이 언급했다는 시민혁명의 실체가 이런 것이라면 이는 시민 없는 시민혁명일 뿐이 아닌가. 첫머리에 꺼낸 얘기를 마무리짓는다. 학생들의 알 수 없는 웃음에 나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나라 경제가 더 나빠지더라도 우리 세대는 그래도 나을 것이다. 더 어려운 과거를 거쳐 왔으니까. 그러나 자네들은 어떤가. 일찍부터 높은 소비수준에 길들여져 왔으니 훨씬 견디기 힘들지 않겠는가. 이 말에 학생들은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양 건 (한양대 교수.헌법학) 출처 - 중앙일보 2004. 10. 21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