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복지’ 전시행정 우려
	2004-10-13
‘노인복지’ 전시행정 우려 지난 여름방학에 대학원생들과 함께 일본 고베(神戶)시에 있는 대규모 노인종합복지시설을 견학한 적이 있다. 60만평이 넘는 넓은 땅에 다양한 복지시설과 온천, 골프장 등을 갖추고 있어서 노인복지시설이라기보다는 아름다운 도시공원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운영자는 만성 적자에 시달리는 재정 상태와 접근성 부족에서 오는 여러 문제들을 솔직히 고백했다. 내가 보기에도 건강한 노인이라면 모를까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이용하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교통이 불편해 보였으며, 이용료도 부담스러울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이 최근 한국 복지담당 공무원들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되고 있다는 것이 안내자의 설명이었다. 나는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무원들은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멋진 노인복지시설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특히, 지방자치단체들로서는 경쟁적으로 더 크고 멋진 시설을 짓고 유치함으로써 해당 지자체의 복지 의지가 높다는 점을 전국에 과시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일까? 지금 우리에게 더 시급한 것은 크고 화려한 복지시설이 아니라 보다 접근하기가 쉽고 내실 있는 서비스가 아닐까? 복지마저도 전시효과적 행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 심히 걱정됐다. 그리고 지난 주, 92세 노인이 치매와 중풍에 시달려온 93세 아내를 목졸라 살해하고 자신도 목을 매 목숨을 끊은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자식들에게 “살만큼 살고 가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장례비용까지 남겼다는 이 노인의 삶과 죽음은 우리나라 노인 복지의 현주소를 소름끼치도록 잘 보여준다. 한쪽 끝에는 화려한 실버타운에서 다양한 서비스를 받는 노인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 끝에는 국가가 제공하는 최소한의 보호와 서비스를 받는 극빈층의 노인들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노인들은 그 중간에 위치해 있다. 여유 있는 중산층도 아니고, 그렇다고 극빈층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보통사람들, 국민고통지수의 영향을 누구보다 심하게 받는 노인들은 오늘도 속수무책인 채로 복지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건강할 때는 그런 대로 버티지만, 치매처럼 치명적인 병에라도 걸리면 그나마 남아 있던 가족의 정마저 산산조각 나기 일쑤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품위 있게 살 권리를 보장해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복지부 통계는 전국에 246개의 치매상담센터가 있음을 알려주지만, 그 어려운 치매환자 수발을 혼자서 감당하고 끝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92세의 노인에게 그 숫자는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새로 제정되는 고령사회기본법을 포함한 모든 노인복지정책들이 전시효과적인 허울을 벗고,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다수의 보통노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추진되기를 촉구한다. 다가올 고령사회에서 국가경쟁력을 도모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수단도 중요하지만, 더 시급한 것은 당장 고통 받고 있는 노인들과 그 가족들을 진정어린 마음으로 이해하고, 체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의지라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노인복지정책 담당자들은 바로 우리 동네 한가운데 있는 가정봉사원파견센터와 요양시설, 치매전문요양시설이 훨씬 더 시급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선진국의 경험을 통해 효과적이면서도 비용절약적인 사업으로 검증된 바 있는 재가복지사업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런 노력이 계속돼야만 죽는 순간까지도 자식들에게 부담주지 않고 자기 책임을 다하려고 하는 우리의 노인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말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배우자 살해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자기 결정을 하지 않고도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한혜경 (호남대 사회복지학 교수) 출처 - 문화일보 2004. 10. 13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