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직무유기, 해도 너무한다
	2004-08-06
국회 직무유기, 해도 너무한다 국민들은 탄핵정국의 산고 속에 탄생한 새 국회에 적지 않은 희망을 걸었다. 많은 초선의원들로 새롭게 구성된 국회가 과거의 폐습과 타성을 벗고 안정 속에서 각 방면의 개혁작업들을 성실히 추진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과 기대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몇몇 징후가 지금 여의도에서는 감지되고 있다. 최근 법제처가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의 한 국회의원에게 제출한 ‘위헌결정 법률 정비 현황’이라는 자료에 따르면,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 혹은 헌법불합치결정이 난 뒤에도 국회에 의해 개정되지 않고 미정비 상태로 남아 있는 법률이 총 26건에 달한다고 한다. 한숨만 나오게 하는 국회의 심각한 직무유기다. 그 방치된 법률들 가운데는 무려 12년 전인 1992년에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결정을 받은 국가보안법 제19조도 포함돼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국가보안법상의 찬양·고무죄 규정 등을 위반한 이들에게 50일까지 구속기간을 연장할 수 있게 한 이 조항이 불필요한 장기 구속을 허용한 것으로 신체의 자유에 대한 과잉 제한이 되어 위헌의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후 12년 동안이나 계속된 국회 내의 오랜 이념 논쟁의 결과 이 조항은 여태껏 손질되지 못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지금 개정한다 해도 강산이 변한 후의 뒷북치기 법 개정일 수밖에 없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올해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결정이 내려진 9건의 경우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국회에서 개정안의 발의조차 이뤄지지 않은 채로 방치되는 푸대접을 받고 있다. 위헌선언으로 무효화된 법조항이 새로운 개정 법률로 대체되지 못하고 남아 있으면 그 위험은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이 된다. 위헌결정으로 법 조항이 폐지되는 효과가 발생했는데도 그 법 조항이 안장되지 못한 시체처럼 법전 속에 남아 있게 되면, 국민들은 법률 생활과 관련하여 어느 조항에 근거해야 할지 몰라 법적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회의 이러한 뻔뻔스러운 직무유기 뒤에는 사법부 경시 심리가 은연 중에 깔려 있다. 헌법재판소법 제47조 1항이 위헌결정의 기속력을 인정하여 모든 국가기관 및 지방자치단체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하고 이에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란 듯이 법 개정에 손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몇 달 전에 헌법재판소의 탄핵결정을 앞두고 탄핵 철회 여론이 일었을 때, ‘사법부 존중’을 이유로 헌법재판소 결정을 차분히 기다리겠다고 한 국회가 아니었던가. 국회는 입법 기능과 함께 탄핵소추권 행사와 같은 국정통제 기능, 국무총리 임명에 대한 동의권 행사와 같은 헌법기관 구성에 관한 기능 등 여러 기능을 수행한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주된 국회 본연의 기능은 역시 입법 기능이다. 그러나 우리 국회는 입법 기능에는 소홀하면서 국정통제 기능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정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현재의 국회 상황”을 이야기한 한 국회의원의 넋두리가 이를 증언한다. 지금은 ‘국가정체성’과 같은 실체도, 논의의 실익도 없는 화두를 놓고 소모적인 입씨름만 할 때가 아니다. 국가정체성은 말로써가 아니라 건설적인 법률 제정이나 효율적인 법 집행 등 구체적인 국정 수행 활동을 통해 보여주면 된다. 오히려, 국회는 국회 본연의 입법 기능에 더 충실해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위헌선언으로 그 효력을 잃은 법 조항들을 판결 취지를 충분히 살려 그에 맞게 개정해 나가는 것은 입법 기능 수행의 필요최소한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자꾸만 어려워지고 있는 민생을 살리기 위한 민생 관련 입법의 대폭적이고 전향적인 정비에 영일이 없어야 할 국회다. 국회는 이런 기본적인 할 일부터 우선 제대로 하라. 정쟁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임지봉 (건국대 헌법학 교수) 출처 - 문화일보 2004. 8. 6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