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문화라고 해봐야 텔레비전 시청이나 이따금 외식이 고작이다. 직장문화는 어떤가? 1차, 2차 거듭할수록 몸과 정신이 망가지는 소모적인 놀이 문화, 폭탄주와 노래방·고스톱으로 이어지는 회식문화가 전부 아닌가.
어른 문화의 빈곤은 ‘압축적 산업화 과정’의 결과다. 외형적 성장 제일주의는 일에만 매달리는 ‘회사인간’을 요구했고, 여가와 문화 향유를 등한시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이제 제대로 된 어른 문화를 만들자. ‘소득 3만달러 시대’를 열려면 이에 걸맞은 어른 문화가 필요하다. 이것이 ‘코리아 프로젝트 2020’ 기획팀의 네번째 제안이다.
문화(Culture)는 ‘마음의 경작(Cultivation)’이다. 소비하고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삶을 충전하고 생산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성숙한 어른 문화가 꼭 고급문화일 필요는 없다. 고급과 저급문화의 이분법도 문화 엘리트주의적 발상이다. 중요한 것은 문화의 다양성과 개성을 살리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우선 전 국민이 ‘1인 1문화 운동’을 벌일 것을 제안한다. 각자 한가지씩 좋아하는 문화(예술) 활동을 갖자는 것이다. 그림, 악기 연주, 노래, 연극 무엇이든 좋다. 또 이를 발전시켜 ‘1인 1페이트론(Patron·후원자) 운동’을 펴나가자. 국민 모두 문화활동을 하나씩 골라 후원자가 되는 것이다. 어른에겐 ‘문화’가 생기고 문화 종사자는 든든한 격려자를 얻는다.
또 직장과 동네 단위로 ‘풀뿌리 문화동호모임’을 활성화하자. 문화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이 몸에 배기까지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문화동호회에 가족 단위로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모범적인 문화모임에 보조금을 주는 등 지원 시스템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활동 체험을 그 사람의 ‘캐리어(경력)’로 인정해 우대하는 사회 분위기를 정착시켜야 한다. 이제 낭비적이고 획일적인 어른문화와 결별하고 다양한 직장·가족·부부 문화를 만들어 보자.
( 김호기 연세대 교수·2020기획위원 )
[미래로 가자] 전문가들이 말하는 고급문화 공략법
호기심-열린 마음으로 ‘고급문화 공포증’없애자
“6개월만 꾸준히 미술 전람회를 다녀보라.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미술평론가 이주헌씨) “전위(前衛)문학은 피해라. 글로 된 것은 집히는 대로 읽다보면 문학적 감수성도 생긴다.”(시인 김정환씨) “편안하게 다가오는 곡을 하나씩 늘여가면 어느 순간 클래식 애호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KBS라디오 PD 김혜선씨) ‘고급문화’라고 해서 모두 난해한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에게 예술과 문화를 전파하는 문화리더들은 우리 사회가 어른 문화를 만들려면 우선 ‘고급문화 공포증’에서 벗어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문화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고급문화 접근법’은 간단하다. 미술의 경우 현대미술은 가급적이면 피하는 게 좋고, 문학도 현대시는 ‘우회’의 대상이다. 클래식도 현대음악이나 전곡(全曲) 감상은 뒤로 미루라는 것. 한마디로 요약하면 “문화예술은 과시용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라.”
서울아트스페이스 이주헌관장(41)은 방송진행ㆍ갤러리투어ㆍ강연ㆍ 저술활동 등을 통해 ‘우리 가까이에 있는 미술’을 전파하고 있다. 그는 “추상화나 이해되지 않는 그림 앞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고 처음에는 전시장 안팎의 분위기 자체를 즐기는 것도 미술의 세계로 들어가는 좋은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조금씩 그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책을 보는 것도 심미안을 넓히는 효과적 방법이라고 말한다.
또 고급문화가 우리 사회에 보다 넓게 확산되려면 주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이 관장은 “가정에서 주부가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남편이나 아이들도 따르게 되고 결국은 가족이 함께 즐기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지나치게 감동에 집착하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미술 애호를 그르칠 수 있다”는 게 그의 경고다.
클래식 전문채널로는 파격적으로 클래식 클로스오버(클래식과 팝의 만남) 민속음악 재즈까지 함께 틀어주는 KBS 1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세상의 모든 음악’. 이달 1일부터 이 프로의 진행을 맡고있는 김혜선PD(40)는 15년째 클래식만 담당해온 전문가다. 김PD는 “클래식과 친숙해지기 위해 처음엔 명음반보다 내가 아는 클래식곡을 즐기라”고 권한다. 클래식 초보자는 통상 ‘입구에서 헤매는 사람’으로 끝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은 성악가와 팝가수의 공동음악, 초보자들을 위한 다양한 테마의 편집음반, 듣기 편한 곡들을 중심으로 연주하는 각종 음악회 등이 많기 때문에 그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쉽게 클래식의 바다에 빠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올해로 10년째 한국문화예술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시인 김정환씨(49)도 지루하고 난삽한 고전문학을 기피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기’를 권하고 있다. 그는 “문학적 감수성이 고전작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며 “오히려 학교에서 받은 그릇된 문학교육의 폐습에서 벗어나겠다는 열린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또 문학을 ‘지식’으로만 접근하려는 잘못된 자세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남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한 철학강의센터 ‘필로소피아’를 운영중인 영운덕씨(43·고려대 철학과 강사)는 ‘진리에 접근하는 법이 하나가 아니듯, 철학에 친숙해지는 방법도 하나가 아니다”고 말한다. 양씨는 “현대 철학의 복잡한 학설을 소개할 때 수강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상 생활이나 가족관계에 비유해 설명한다”면서 “철학이 어른 문화의 한 영역이 되려면 철학이 딱딱하고 추상적인 학문이라는 선입견부터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고급문화’의 벽을 넘기 위해서는 우선 문화가 ‘고상한 무엇’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릴 것,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열린 마음을 갖고 다양한 문화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얘기다. ( 李翰雨기자 hwlee@chosun.com )
◆열명중 한명꼴 "1년에 한번 고급문화 관람"
우리 국민의 문화예술행사 관람 빈도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로 경제여건이 악화되었던 이유도 있지만 ‘성숙한 어른문화 만들기’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셈이다.
문화관광부와 한국문화정책개발원이 남녀 20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1년 동안(2000년) 문화행사를 1건 이상 관람한 비율은 54.8%로 IMF위기 전인 지난 97년(66.8%)보다 상당히 낮아졌다. 더욱이 대중문화로 분류되는 영화를 제외하면 이른바 ‘고급문화’ 관람률은 연평균 10% 안팎에 불과한 실정. 관람횟수도 연평균 0.17회로 97년(0.29회)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분야별로 전통예술·문학·무용공연 관람이 연평균 0.1회 이하로 특히 저조했으며, 미술관람·클래식음악·오페라공연·연극·뮤지컬 등도 연평균 0.2∼0.3회에 불과했다.
여가 활용 수단이 특별히 없다는 것도 어른 문화의 빈곤을 입증하고 있다. ‘여가 시간이 남으면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평일의 경우 ‘텔레비전 보기’가 20.3%로 가장 많았고 ‘그냥 집에서 쉰다’가 13.8%, ‘신문·잡지 보기’가 9%를 차지했다. 주말의 경우에도 텔레비전 보기가 14.1%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이 ‘친구만나기(모임참가)’ 11.9%, ‘집에서 쉰다’ 11.6%, ‘가족과 외식’ 8.8%, ‘쇼핑’ 5.7% 순으로 ‘문화 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李濬기자 junlee@chosun.com )
[미래로 가자] 서울대생이 본 ‘2020년 연애 문화’
부부 각자가 ‘사이버 연애’즐겨
“1명의 아내가 두 명의 남편(형제)과 함께 한 지붕 밑에서 산다. 그러나 아무런 긴장·갈등이나 불편함이 없다. 반대로 일부다처(一夫多妻)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스웨덴 출신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쓴‘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1992)’에 나오는 인도 북부 라다크 지방의 결혼 풍습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2020년 한국에 현실로 나타날지 모른다. 적어도 20대 대학생들의 머 릿속에선‘20년 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宋虎根·2020 기획위원) 교수는 이번 학 기에 강의중인‘현대사회와 사회학’수강 학생들에게 과제를 냈다. ‘2020년의 세계’라는 주제로 리포트를 쓰게 한 것.
그 중 홍병웅·정홍규 두 학생이 함께 작성한‘2020년의 연애·결혼 문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2020년 서울에 사는 주현은 한 남자의 아 내이면서 두 아이의 어머니. 어엿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 평범한 주 부이자 이혼 전문 변호사다. 하지만 주현은 IBF(Internet Boy Friend)가 두 명이나 있다. 웹상과 현실의 구분이 애매해지면서 그 중 하나는 제2의 남편이라고 여길 정도로 소중한 존재다.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는 그는 음악치료사로 자주 주현의 피로를 음악으로 풀어줄 뿐 아니라 음악편지를 보내 감동시키기도 한다.…”
한편의 가상소설을 읽는 듯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수긍할 만한 대목이 없지 않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리포트를 작성한 대학생들이 ‘주현’의 행동을 ‘불륜이 아니다’고 규정한 점.
“2020년쯤에는 불륜의 개념도 바뀌어 지속적인 성 관계나 장기 동거가 아니라면 ‘단순 교제’의 범위에 속하게 될 것”이란 게 대학생들이 제시한 논거다.
대학생들은 이런‘파격’을 가능케 하는 요인으로‘사이버 공간’ 을 꼽았다. 인터넷 공간상의 자기 분신인‘아바타(Avartar)’문화 가 발전하면‘아바타’를 통한 데이트나 연애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추론이다. 그 때쯤 되면‘웹데이트(사이버연애)’용 의자, 가상(假想)영상과 음성을 체험할 수 있는 특수 안경과 헤드세트 등도 개발 돼 실제 이상으로‘생생한’사이버 연애가 가능할 것이란 얘기다.
물론 2020년의 이런 문화적 대변화는 상당한 부작용도 불러올 것 으로 대학생들은 내다봤다. 공지윤 학생은“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 지던 가치관이나 사회규범이 혼란에 빠지면서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이 말하는 소위‘아노미(Anomie)’현상이 극심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송호근 교수는“디지털화가 진전돼 사회 구성 원간의 인간적 유대감이 약해질수록 내면적으로는 사랑받고 싶은 본 능이 더 크게 자리잡게 된다”며“주류(主流)사회와 지역공동체가 이들 아노미 그룹을 어떻게 감싸고 조화시키느냐에 따라 미래의 명 암(明暗)이 엇갈릴 것”이라고 말했다.
( 崔聖煥전문기자 sungchoi@chosun.com ) 출처 - 조선일보 2002. 4. 13
[2020 미래로 가자]폭탄주-고스톱 문화 벗어나자
온 국민이 ‘1인 1기예 운동’제휴를
우리 사회 어른에게는 ‘문화’가 없다. 아니 있기는 하되 제대로 된 문화가 없다.
가족문화라고 해봐야 텔레비전 시청이나 이따금 외식이 고작이다. 직장문화는 어떤가? 1차, 2차 거듭할수록 몸과 정신이 망가지는 소모적인 놀이 문화, 폭탄주와 노래방·고스톱으로 이어지는 회식문화가 전부 아닌가.
어른 문화의 빈곤은 ‘압축적 산업화 과정’의 결과다. 외형적 성장 제일주의는 일에만 매달리는 ‘회사인간’을 요구했고, 여가와 문화 향유를 등한시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이제 제대로 된 어른 문화를 만들자. ‘소득 3만달러 시대’를 열려면 이에 걸맞은 어른 문화가 필요하다. 이것이 ‘코리아 프로젝트 2020’ 기획팀의 네번째 제안이다.
문화(Culture)는 ‘마음의 경작(Cultivation)’이다. 소비하고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삶을 충전하고 생산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성숙한 어른 문화가 꼭 고급문화일 필요는 없다. 고급과 저급문화의 이분법도 문화 엘리트주의적 발상이다. 중요한 것은 문화의 다양성과 개성을 살리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우선 전 국민이 ‘1인 1문화 운동’을 벌일 것을 제안한다. 각자 한가지씩 좋아하는 문화(예술) 활동을 갖자는 것이다. 그림, 악기 연주, 노래, 연극 무엇이든 좋다. 또 이를 발전시켜 ‘1인 1페이트론(Patron·후원자) 운동’을 펴나가자. 국민 모두 문화활동을 하나씩 골라 후원자가 되는 것이다. 어른에겐 ‘문화’가 생기고 문화 종사자는 든든한 격려자를 얻는다.
또 직장과 동네 단위로 ‘풀뿌리 문화동호모임’을 활성화하자. 문화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이 몸에 배기까지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문화동호회에 가족 단위로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모범적인 문화모임에 보조금을 주는 등 지원 시스템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활동 체험을 그 사람의 ‘캐리어(경력)’로 인정해 우대하는 사회 분위기를 정착시켜야 한다. 이제 낭비적이고 획일적인 어른문화와 결별하고 다양한 직장·가족·부부 문화를 만들어 보자.
( 김호기 연세대 교수·2020기획위원 )
[미래로 가자] 전문가들이 말하는 고급문화 공략법
호기심-열린 마음으로 ‘고급문화 공포증’없애자
“6개월만 꾸준히 미술 전람회를 다녀보라.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미술평론가 이주헌씨) “전위(前衛)문학은 피해라. 글로 된 것은 집히는 대로 읽다보면 문학적 감수성도 생긴다.”(시인 김정환씨) “편안하게 다가오는 곡을 하나씩 늘여가면 어느 순간 클래식 애호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KBS라디오 PD 김혜선씨) ‘고급문화’라고 해서 모두 난해한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에게 예술과 문화를 전파하는 문화리더들은 우리 사회가 어른 문화를 만들려면 우선 ‘고급문화 공포증’에서 벗어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문화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고급문화 접근법’은 간단하다. 미술의 경우 현대미술은 가급적이면 피하는 게 좋고, 문학도 현대시는 ‘우회’의 대상이다. 클래식도 현대음악이나 전곡(全曲) 감상은 뒤로 미루라는 것. 한마디로 요약하면 “문화예술은 과시용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라.”
서울아트스페이스 이주헌관장(41)은 방송진행ㆍ갤러리투어ㆍ강연ㆍ 저술활동 등을 통해 ‘우리 가까이에 있는 미술’을 전파하고 있다. 그는 “추상화나 이해되지 않는 그림 앞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고 처음에는 전시장 안팎의 분위기 자체를 즐기는 것도 미술의 세계로 들어가는 좋은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조금씩 그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책을 보는 것도 심미안을 넓히는 효과적 방법이라고 말한다.
또 고급문화가 우리 사회에 보다 넓게 확산되려면 주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이 관장은 “가정에서 주부가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남편이나 아이들도 따르게 되고 결국은 가족이 함께 즐기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지나치게 감동에 집착하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미술 애호를 그르칠 수 있다”는 게 그의 경고다.
클래식 전문채널로는 파격적으로 클래식 클로스오버(클래식과 팝의 만남) 민속음악 재즈까지 함께 틀어주는 KBS 1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세상의 모든 음악’. 이달 1일부터 이 프로의 진행을 맡고있는 김혜선PD(40)는 15년째 클래식만 담당해온 전문가다. 김PD는 “클래식과 친숙해지기 위해 처음엔 명음반보다 내가 아는 클래식곡을 즐기라”고 권한다. 클래식 초보자는 통상 ‘입구에서 헤매는 사람’으로 끝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은 성악가와 팝가수의 공동음악, 초보자들을 위한 다양한 테마의 편집음반, 듣기 편한 곡들을 중심으로 연주하는 각종 음악회 등이 많기 때문에 그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쉽게 클래식의 바다에 빠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올해로 10년째 한국문화예술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시인 김정환씨(49)도 지루하고 난삽한 고전문학을 기피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기’를 권하고 있다. 그는 “문학적 감수성이 고전작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며 “오히려 학교에서 받은 그릇된 문학교육의 폐습에서 벗어나겠다는 열린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또 문학을 ‘지식’으로만 접근하려는 잘못된 자세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남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한 철학강의센터 ‘필로소피아’를 운영중인 영운덕씨(43·고려대 철학과 강사)는 ‘진리에 접근하는 법이 하나가 아니듯, 철학에 친숙해지는 방법도 하나가 아니다”고 말한다. 양씨는 “현대 철학의 복잡한 학설을 소개할 때 수강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상 생활이나 가족관계에 비유해 설명한다”면서 “철학이 어른 문화의 한 영역이 되려면 철학이 딱딱하고 추상적인 학문이라는 선입견부터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고급문화’의 벽을 넘기 위해서는 우선 문화가 ‘고상한 무엇’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릴 것,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열린 마음을 갖고 다양한 문화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얘기다. ( 李翰雨기자 hwlee@chosun.com )
◆열명중 한명꼴 "1년에 한번 고급문화 관람"
우리 국민의 문화예술행사 관람 빈도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로 경제여건이 악화되었던 이유도 있지만 ‘성숙한 어른문화 만들기’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셈이다.
문화관광부와 한국문화정책개발원이 남녀 20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1년 동안(2000년) 문화행사를 1건 이상 관람한 비율은 54.8%로 IMF위기 전인 지난 97년(66.8%)보다 상당히 낮아졌다. 더욱이 대중문화로 분류되는 영화를 제외하면 이른바 ‘고급문화’ 관람률은 연평균 10% 안팎에 불과한 실정. 관람횟수도 연평균 0.17회로 97년(0.29회)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분야별로 전통예술·문학·무용공연 관람이 연평균 0.1회 이하로 특히 저조했으며, 미술관람·클래식음악·오페라공연·연극·뮤지컬 등도 연평균 0.2∼0.3회에 불과했다.
여가 활용 수단이 특별히 없다는 것도 어른 문화의 빈곤을 입증하고 있다. ‘여가 시간이 남으면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평일의 경우 ‘텔레비전 보기’가 20.3%로 가장 많았고 ‘그냥 집에서 쉰다’가 13.8%, ‘신문·잡지 보기’가 9%를 차지했다. 주말의 경우에도 텔레비전 보기가 14.1%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이 ‘친구만나기(모임참가)’ 11.9%, ‘집에서 쉰다’ 11.6%, ‘가족과 외식’ 8.8%, ‘쇼핑’ 5.7% 순으로 ‘문화 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李濬기자 junlee@chosun.com )
[미래로 가자] 서울대생이 본 ‘2020년 연애 문화’
부부 각자가 ‘사이버 연애’즐겨
“1명의 아내가 두 명의 남편(형제)과 함께 한 지붕 밑에서 산다. 그러나 아무런 긴장·갈등이나 불편함이 없다. 반대로 일부다처(一夫多妻)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스웨덴 출신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쓴‘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1992)’에 나오는 인도 북부 라다크 지방의 결혼 풍습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2020년 한국에 현실로 나타날지 모른다. 적어도 20대 대학생들의 머 릿속에선‘20년 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宋虎根·2020 기획위원) 교수는 이번 학 기에 강의중인‘현대사회와 사회학’수강 학생들에게 과제를 냈다. ‘2020년의 세계’라는 주제로 리포트를 쓰게 한 것.
그 중 홍병웅·정홍규 두 학생이 함께 작성한‘2020년의 연애·결혼 문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2020년 서울에 사는 주현은 한 남자의 아 내이면서 두 아이의 어머니. 어엿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 평범한 주 부이자 이혼 전문 변호사다. 하지만 주현은 IBF(Internet Boy Friend)가 두 명이나 있다. 웹상과 현실의 구분이 애매해지면서 그 중 하나는 제2의 남편이라고 여길 정도로 소중한 존재다.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는 그는 음악치료사로 자주 주현의 피로를 음악으로 풀어줄 뿐 아니라 음악편지를 보내 감동시키기도 한다.…”
한편의 가상소설을 읽는 듯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수긍할 만한 대목이 없지 않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리포트를 작성한 대학생들이 ‘주현’의 행동을 ‘불륜이 아니다’고 규정한 점.
“2020년쯤에는 불륜의 개념도 바뀌어 지속적인 성 관계나 장기 동거가 아니라면 ‘단순 교제’의 범위에 속하게 될 것”이란 게 대학생들이 제시한 논거다.
대학생들은 이런‘파격’을 가능케 하는 요인으로‘사이버 공간’ 을 꼽았다. 인터넷 공간상의 자기 분신인‘아바타(Avartar)’문화 가 발전하면‘아바타’를 통한 데이트나 연애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추론이다. 그 때쯤 되면‘웹데이트(사이버연애)’용 의자, 가상(假想)영상과 음성을 체험할 수 있는 특수 안경과 헤드세트 등도 개발 돼 실제 이상으로‘생생한’사이버 연애가 가능할 것이란 얘기다.
물론 2020년의 이런 문화적 대변화는 상당한 부작용도 불러올 것 으로 대학생들은 내다봤다. 공지윤 학생은“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 지던 가치관이나 사회규범이 혼란에 빠지면서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이 말하는 소위‘아노미(Anomie)’현상이 극심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송호근 교수는“디지털화가 진전돼 사회 구성 원간의 인간적 유대감이 약해질수록 내면적으로는 사랑받고 싶은 본 능이 더 크게 자리잡게 된다”며“주류(主流)사회와 지역공동체가 이들 아노미 그룹을 어떻게 감싸고 조화시키느냐에 따라 미래의 명 암(明暗)이 엇갈릴 것”이라고 말했다.
( 崔聖煥전문기자 sungchoi@chosun.com )
출처 - 조선일보 2002. 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