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이 불법자금 내는 이유
	2004-02-16
재벌이 불법자금 내는 이유 정치자금은 고수익 투자 … 법 테두리서 이익내도록 기업들의 불법 정치자금 제공관련 뉴스를 보면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대규모 불법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나타난 기업들 중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 집단, 심지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었다는 그룹까지 포함돼 있다. 이들이 돈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습게도 우리 기업들은 역사에서 배우는 학습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이다. 기업활동의 최대 목표는 이윤의 극대화이다. 우리 대기업들은 경제개발 초기부터 지금까지 권력과의 유착(癒着)관계가 이윤극대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혹자는 IMF위기 이후 정경유착 관계가 더 이상 기업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권력과의 유착관계 강화에 투자하는 비용보다 이로부터 발생하는 기대수익이 훨씬 크다고 판단할 수 있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 DJ정부 시절 수백억원을 투자하여 무려 수조원이 넘는 혜택을 입었던 H그룹의 사례가 있다. 아직 권력이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지금 참여정부에서도, 기업공개를 통해 생겨난 막대한 차익(差益)은 소유주 일가가 많은 부분을 가져가고, 그 기업이 부실해져서 시장에 팽개쳐 버리면 정부가 뒤처리를 담당하는 L그룹 사례도 있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권력에의 투자는 아직까지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장사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대기업이 엄청난 불법자금을 제공하는 다른 이유는 대기업과 정치권력이 뒤엉키는 정글에서 기업들은 약자(弱者)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는 돈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사회의 투명화 상태나 제도화 정도에서 정치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기업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은 정치권력에 대해 약자일 수밖에 없다. 설령 부당한 요구(아니 대부분의 경우가 부당한 요구지만)라고 해도, 그것이 단순히 약간의 불이익의 차원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될 때 약자인 기업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지금 야당 쪽 불법자금은 끝없이 밝혀지고, 여당의 불법자금은 거의 밝혀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야당이 현금을 받았다면, 여당은 지금 ‘대기업의 침묵’이라는 또 다른 의미의 정치자금을 받고 있는 셈이다. 모두 권력 앞에 기업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기업과 불법 정치자금의 문제는 기업가와 정치인의 윤리교육 강화로 풀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국민들과 일부 정치인들의 의식수준이 만들어 낸 돈 드는 정치이며, 우리 역사가 만들어낸 미완성의 시장경제 제도이다. 돈 드는 정치의 최대 피해자는 결국 국민이다. 돈이 드는 정치구조를 타파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또한 반드시 필요한 만큼의 돈은 객관적으로 투명하게 조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나아가 정치권력과의 유착 정도가 기업의 앞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천한 시장경제제도의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 그리하여 기업들이 정치권력의 부침과 관계없이 법과 제도의 테두리 내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일에만 매진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지금 한국에서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많은 일들이 되는 사람만 되고 안 되는 사람은 안 된다. 이런 구조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천하의 어떤 대기업이라도 또다시 불법 정치자금을 줄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단지 검찰수사만을 통해 불법정치자금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강석훈 (성신여대 경제학 교수) 출처 - 조선일보 2004. 2. 16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