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노’와 주체사상 - 홍진표
	2004-11-15
‘전공노’와 주체사상 전국공무원노조(전공노)가 지난 9월 일부 조합원을 상대로 실시한 교육에 북한의 주체사상과 유사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필자는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10여년을 주사파로 활동했었고, 이번에 한 신문에서 전공노의 문제의 자료를 분석하는 자문에 응했다. 이 자료와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북한의 주체사상 기본서를 비교하면 누구라도 표절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위장이 미숙한 수준이었다. 전공노는 “강의 내용이 친북적이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그 강의를 듣고 있을 공무원이 누가 있겠느냐”며 반론을 펴고 있는데, 바로 이 대목이 미스터리다. 유래나 출처가 전혀 설명돼 있지 않은 철학이론 강의에 대해서 강의를 들었다는 85명 중 아무도 궁금증을 갖지 않고 넘어갔다는 해명은 이해할 수 없다. 그 중 대학가에서 어깨 너머라도 주체사상을 접했을 세대가 과연 없었다는 것인가? 목적의식적인 조직자, 맹목적 추종자, 비겁한 방관자들의 공모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짙다. 전공노는 어디까지나 이익집단인데 공공연하게 특정한 이념교육을 했다는 사실이 무척 믿기 어려운 일로 여겨진다. 고립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일이 전공노 지도부의 실수가 아니라는 것은 문제의 교육자료집 대부분이 반(反)자본주의와 친북반미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번 전공노에서 벌어진 사태는 이익집단과 좌파이념이 결합되는 현상으로, 국내에서 매우 흔하게 발견된다. 이익집단과 좌파 이념의 결합이 이뤄지는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들 수 있다. 우선, 한국의 주요 이익단체들을 만드는 데 좌파 성향의 운동권 출신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80년대에 수천 명의 운동권 대학생이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이들 이익단체 조직자들이 그 내부에서 자신이 신봉하는 이념을 전파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익집단의 구성원들은 명분을 갖는 것을 선호한다. 이 대목은 지극히 한국적 현상으로 보인다. 서구처럼 이익집단이 정직하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한국적 체면은 흔쾌하지도 떳떳하지도 못한 것이다. 그 결과 밥그릇 지키기에 적당한 대의나 명분의 포장을 추구한다. 이때 이익집단의 명분찾기에서 좌파 이념이 선택될 가능성이 커진다. 한국 사회에서 지난 수년간 좌파 경향이 진보로 평가되면서 그 매력은 더욱 커지게 됐기 때문이다. 세번째로, 이익집단이 진보라는 색깔을 갖게 되면 한꺼번에 많은 지원군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우리 사회에 강한 편가르기 논리가 존재하는 만큼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진보의 색깔을 띠면 그 안에서는 최소한 비판은 면제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전공노의 단체행동권 주장에 대해 국민의 80% 이상이 반대하는 현실에서 이른바 진보를 자처하는 세력 안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기능이 마비돼 있는 것이다. 이익집단과 좌파 이념의 결합은 일종의 거래이자 야합이다. 이 둘의 결합은 원초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미 사회주의가 불가능한 것으로 역사적 검증이 끝난 시대에 이익집단에 좌파 이념은 무의미해졌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익집단은 충분한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얼마든지 그 존재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오직 배타적 이익과 공공의 이익을 조화시키는 숙제만 풀면 된다. 그러나 각종 이익단체의 좌파 이념 지향이 내부에서 자유로운 토론에 의해 해소될 가능성은 당분간 극히 희박해 보인다. 오랜 기간 좌파 이념과 조직의 정체성이 뗄 수 없이 연결돼 버렸으며 심지어 자신들이 본질적으로 이익단체라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다. 결코 반론되기 어려운 강제된 동의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홍진표 (시민회의 정책실장) 출처 - 문화일보 2004. 11. 13 포럼